• 최종편집 2022-08-09(화)
 

 

용인을 대표하는 백암농악을 세상에 알린 차용성 선생이 10월 25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 선생은 1928년 4대 독자로 백암면 용천리 율리에서 태어났다. 백암은 용인에서 가장 넓은 평야가 펼쳐진 비옥한 곡창지대다. 백암장은 예로부터 유명했으며 우시장은 전국에서 알아주는 큰 규모였다. 그런 환경 탓에 배개미(백암)장과 백중축제가 열릴 때는 인근 유명 농악을 비롯한 축제가 벌어지곤 했다. 

평생 백암을 떠나지 않았던 차용성 선생은 그런 환경 속에서 누구보다 예민하게 전통예술을 접하고 빠져들었다.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그 모습을 보고 자랐다. “백암장에서 남원용 선생이 노는 모습을 보는데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어. 그래서 배우기 시작했지.” 생전 선생이 들려 준 농악 입문 동기다. 

백암농악은 경기남부권 안성, 평택과 쌍벽을 이루는 농경지 문화권으로 농악이 발달했다. 특히 배개미(백암)장은 근동에서 가장 큰 장시 중 하나였다. 번성한 만큼 장꾼들이 몰려 장사진을 이루었고, 농악을 필두로 한 공연이 성행했다. 

백암농악 차용성.jpg고 차용성 선생은 농사를 짓는 농부였다. 직업적 예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감성과 열정으로 안성 남사당패 이원보 제자인 남원영·이필재로부터 농악을 전수받은 김익수에게 기능을 배웠다. 18세 때 소고를 배우고 상모를 돌리며 두레패에서 활동을 시작해 40대 때 비로소 상쇠(가장 앞에서 전체 음악을 지휘, 꽹과리)를 잡기 시작했다.  

상쇠로서 용인을 대표하는 백암농악의 새로운 계보를 만들고 정립해온 선생의 재능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선생을 기억하는 이들은 소리 부분인 비나리(고사 덕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말한다. 안성 칠장리 임철기로부터 비나리를 전수받아 독보적인 두레소리꾼으로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우리나라 농악을 대표하는 한국민속촌 정인삼 선생도 그 점을 높이 평가하며 차 선생의 영면을 아쉬워했다. “선생은 용인의 별이었다. 별이 떨어졌으니 누가 그 맥을 이어갈지 막막한 심정”이라며 “특히 예로부터 내려오는 용인지역 고사덕담 전승은 차용성 선생이 돌아가심으로서 끊어지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백암농악이 경기‧충청지역의 웃다리 농악에 속하면서도 용인만의 지역적 특색을 가락으로 만들어내는 독창성에 있어서도 선생의 업적이 컸다. 백암농악은 고유의 가락 12채를 그대로 이어오면서 다른 농악에서는 볼 수 없는 암탈과 숫탈이 들어가고 고유가락을 겹가락으로 구성하는 쩍쩍이 가락이라는 특유 가락을 사용한다. 그 시작이 차용성 선생이다. 오늘날까지 그 독특한 양식을 인정받아 2007년에는 용인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에서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백암농악 복원 및 재현 사업을 통해 발표회가 열린바 있다. 또 <백암농악의 가락과 판굿 유형>이라는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늘 온화한 얼굴로 선생이 있어야 할 자리라면 그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던 분이었다. 용인 백암농악을 비롯한 향토전통문화 전수에 온 힘을 쏟았던 선생이셨다. 관내 학교를 찾아 전통악기를 강습하고 특기자를 발굴하는가 하면 타 지역 각종대회에 용인을 대표해 출전, 수상하는 등 전통민속 분야에서 지역사회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해왔다. 용구문화제, 경기도 민속경연대회 입상 등 농악발전에 기여한 공로도 컸다. 선생은 또한 용인시 연합농악단을 구성해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공연과 정기발표회 등을 열어왔다. 차용성 선생의 농악발전에 기여한 바가 컸던 만큼 2008년엔 문화예술분야 용인시 문화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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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弔] 용인 백암농악의 상징 차용성 선생, 영면에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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