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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류가객 변진심 (최종민의 국악칼럼)
    시조보급에 앞장 선 여류가객(歌客) 변진심한 집에 딸이 다섯이라 하면 요즘 젊은이들은 입을 딱 벌릴 것이다. 어떻게 그 많은 여자아이들이 한 집에서 클 수 있을까?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8남매 10남매를 둔 가정이 많았고 여러 형제나 여러 자매가 함께 크는 경우가 많았다. 시조명창으로 여류 가객으로 크게 활동하는 변진심도 딸이 많은 집의 셋째 딸이다. 무엇보다 딸 다섯이 다 국악을 했다는 것이 화제가 될 만하다. 첫째는 변금자로 가야금을 전공하여 전주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둘째는 변영숙으로 역시 가야금을 전공했는데 딸 셋도 모두 국악을 시켜 ‘가야랑’이라는 연주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셋째가 변진심이고 넷째는 거문고를 전공한 한양대학교 변성금교수이다. 그리고 다섯째 역시 해금을 전공하고 서울대 등에서 가르치는 변종혁이다. 위로 오빠가 하나 있고 다음으로 내리 딸이 다섯인데 이처럼 모두 국악을 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이들은 부모가 국악인이어서 국악을 한 것도 아니다. 부모는 음악과 전혀 관계가 없는 분들이다. 다만 집에 피아노가 있을 정도로 환경이 좋았고 모두들 어린 나이 때 유치원을 다니게 한 것이 예능을 일찍이 개발하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큰 언니 금자는 중학교 과정까지 무용으로 전주에서 날렸다. 헌데 키가 작으니까 무용보다는 가야금이 유리하겠다하여 전주여고 2학년 때부터 가야금을 하게 된 것이 가야금 전공으로 굳어졌다. 맏언니가 가야금을 하니까 그 밑으로는 자연스레 모두 가야금을 배우게 되어 넷째까지 모두 가야금을 잘 하게 되었다. 그 큰 언니가 가야금을 배우기 위해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국립국악원의 최충웅 등에게 배우고 대학의 여러 교수들에게도 배우는 동안 국악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어 동생들을 줄줄이 국악전공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다. 변성금은 전주에서 성심여중을 나왔는데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진학시켰다. 언니에게 가야금을 배워 가야금을 잘 했기 때문에 가야금으로 고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고2 때 학교에서 손 모양을 보고 거문고를 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전공을 바꾸었는데 거문고로 두각을 나타내어 한양대학교 국악과를 장학생으로 졸업한 다음 전주우석대학교 교수로 가 있다가 지금 모교인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 아래 변종혁은 아예 초등학교 학생인 것을 서울로 전학시켜 나중에 국립국악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에서 해금을 전공하고 국립국악원에 연주단원으로 있다가 지금은 대학에서 제자들 가르치는 일과 연주활동을 주로 하고 있다. 변진심은 1954년생이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해서 유명했다. 고등학교 때는 방송에도 나가고 학교행사에서도 독창을 하곤 했다. 시조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노래를 잘 했기 때문이다. 전주에 장상철이라는 분이 학원을 내어 가야금 거문고 시조 등의 국악을 가르치면서 발표회를 준비할 때인데 기악은 출연자가 많았지만 시조를 부를 출연자는 마땅치 않을 때였다. 고1학생인 변진심이 시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한 달 밖에 안 되었지만 공연무대에 세웠다. 그 때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를 불렀는데 끝나니까 어른들이 “월하 월하” 하면서 시조의 명인 김월하 같은 소리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 후 변진심은 월하라는 시조의 명인이 있다는 것도 알았고 본인이 시조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대학으로 진학할 때 시조나 가곡을 공부하는 국악과로 진학할 생각을 해 봤지만 그런 것을 전공할 수 있는 국악과가 얼른 눈에 띄지 않았고 본인도 국악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때였다. 그래서 그냥 성악으로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에 진학했다. 1973년 대학교 1학년 때 서울의 국립국악원에서 제2회 전국국악경연대회가 열렸을 때 변진심은 비전공부문으로 나가서 판소리, 경기창, 서도창 등의 출연자들을 제치고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실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더욱 시조나 가곡과 같은 정가에 관심을 많이 가질 때였는데 둘째 언니가 “성금이와 종혁이 두 어린 동생들을 서울로 데려다 놨는데 마음이 안 놓이니 진심이 네가 가서 밥도 해 주고 동생들 좀 돌봐라”해서 ‘74년 8월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오자마자 처음 찾아 간 곳이 김월하선생님 댁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시조를 했더니 “목소리 참 좋다”하시면서 제자로 받아 주셨다. 김월하선생이 ’73년에 여창가곡의 보유자 되고 고등학생인 김영기와 이승윤을 전수생으로 삼은 지 3개월 되었을 때였다. 변진심은 두 동생들을 돌보면서 가야금 개인지도로 약간의 돈을 벌어서 월하선생님에게 학채를 드리고 꾸준히 여창가곡을 공부했다. 그렇게 2년여 지났을 때 큰 언니(금자)가 와서 “앞으로는 자격증이 있어야 하는 시대가 올 것이니 다시 복학하여 교사자격증을 받도록 해라”하면서 복학에 필요한 돈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변진심은 다시 전주로 내려가서 성악으로 전주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를 3년 후배들과 함께 ‘80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곧 바로 충남 서산 대산중학교를 시작으로 전북 김제 북중과 여자 상업고등학교 음악교사를 ’84년까지 했다. 그 무렵 뉴질랜드의 웰링턴 대학에서 성악과 국악을 다 하는 변진심을 교환학생으로 초청하겠으니 오라고 했지만 가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좀 남는 일이다. 교직에 있으면서도 김월하선생에게 꾸준히 공부하여 ‘86년에 여창가곡을 이수하였다. 그리고 ’87년부터는 국악예술학교에 정가 강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주당 12시간을 맡아 3일간 학교에 나가 가르쳤다. 그 때 가르친 학생들 중 최진숙, 오정해, 강경아, 조주선 등은 판소리 전공학생들이었지만 지금까지 사제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다. 이 후 남원정보국악고등학교 강사도 하고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국악과의 여창가곡 강사도 오래 했다. 경연대회에도 몇 번 나갔다. ‘82년 국립국악원 대회 때는 1등인 금상을 받았었고 ’95년에는 제6회 KBS국악대경연대회 정가부문 금상을 받았다. 2005년에는 1년에 한 명씩 시상하는 KBS국악대상 가악상을 받았다. 그 동안 변진심 정가발표회만 3회를 했고 수 없이 많은 무대에서 여창가곡이나 시조를 공연했다. 음반도 CD 두 장을 냈는데 변진심 정가선집이 그것이다. 얼마 전에는 조금 새로운 시도로 기존의 서양 식 노래로 불리어지는 ‘성불사의 밤’같은 가사를 시조곡조로 불러서 발표회도 하고 음반도 만들었다. 지금은 전남대, 한양대, 추계예대 등에 나가 가르치는 한 편 과천문화원의 시조사범으로 나가기도 한다. 무엇보다 국악FM방송 ‘국악이 좋아요’프로에 나가 매주 한 번씩 시조를 가르친 것이 10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변진심의 시조에 익숙한 애청자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고등학교 때 시작한 시조공부가 여창가곡 공부로 이어졌고 ‘91년에 다시 시조공부를 더 하게 되었는데 그 사연은 이렇다. 둘째 언니(영숙)가 시조와 가사·가곡을 잘 하는 김호성에게 변진심을 데리고 갔다. 평소에 언니와 잘 아는 사이여서 찾아간 것이었는데 노래를 해 보라하여 여창가곡 “버들은 실이되고 ~ ”로 시작하는 이삭대엽을 불렀더니 목이 좋고 꿋꿋하게 잘 부른다고 칭찬했고 부산시립국악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에 김호성이 남창가곡을 하고 변진심이 여창가곡을 하는 기회도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시조를 지도해 주기 시작하여 변진심은 경제시조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었다. 현재 시조의 판도는 석암(石庵) 정경태(鄭坰兌)가 악보와 함께 보급한 석암제가 전국으로 보급되어 경제(京制)시조는 배우는 사람이 드물정도가 되었다. 말하자면 석암제가 절대 우세하고 경제는 위축되었다. 변진심은 경제시조를 보급하고 선양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경제시조보존회를 만들고 2006년 2월 17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창단공연을 했다. 시조공연도 과거와 달리 완창공연이라 하여 평시조, 지름시조, 사설시조, 우조시조, 중허리시조, 사설지름시조, 온지름시조, 우조지름시조, 반각시조 등 12가지 시조를 전부 들려주는 식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 변진심은 여창가곡의 가객이지만 시조보급에 발 벗고 나선 사람이 되었다. 본인이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점이 많아 딸과 아들도 국악을 하도록 유도했다. 딸은 대금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했고 아들은 지금 가곡전공으로 추계예술대학 국악과를 다니고 있다. 본인은 숙대 앞에 경제시조보존회 회관을 만들어 놓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제자들을 위해 매일 출근하여 시조와 가곡을 가르친다. 과천문화원에 가는 일이나 전남대 출강 국악방송에 가는 일 공연 일정 등 엄청나게 바쁜 스케줄이지만 전혀 피곤한 줄 모르고 행복하게 정가의 가객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초에는 남편과 함께 한라산 백록담을 등반하고 올 정도로 건강하고 가끔 부부가 늦은 밤에 집에서 술을 한 잔씩 할 정도로 화목하게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 소망을 물으니 경제시조를 잘 살리고 보급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스승인 김월하처럼 장학금을 많이 마련하여 더 많은 정가전공자들을 양성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변진심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최 종민 --> 최종민의 국악세상 (사진출처 : 국악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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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9
  • 2011년 11월 8일 부산국악방송 (FM 98.5MHz) 개국
    국악전문채널인 '부산국악방송'이 2011년 11월 8일 오후 부산국악원 연악당에서 개국식을 갖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다. 이날 개국식에는 허남식 부산시장 등 내외빈이 참석해 부산국악방송의 출범을 축하했다. 이어 열린 부산국악방송 개국기념 공연에서는 서편제의 소리꾼이자 국악방송 '창호에 드린 햇살'의 진행자인 오정해 씨의 진행으로 부산국악원 정악단을 비롯해 부산민속예술보존회, 김용우, 이종대, 박대성, 박환영, 김남순, 권은영, 신문범 등의 명인들과 2011년 '21C 한국음악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어쿠스틱 앙상블 재비가 신명나는 공연을 펼쳤다. 부산국악방송은 FM 98.5MHz를 통해 부산과 김해, 양산시 일부지역의 청취자 350만 명을 대상으로 전파를 쏜다. 전통음악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지향하는 이 방송은 판소리, 민요, 정가 등 다양한 전통음악을 비롯해 퓨전창작음악, 문화계 소식, 특강, 실황중계, 인물 초대석, 국악교육 프로그램 등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을 24시간 방송하게 된다. 먼저, 전통음악 전문 감상 프로그램인 '흐르는 음악처럼'(매일 오전 3~5시)이 김민경 아나듀서의 진행으로 부산에서 자체 제작하고, 문화예술 정보 프로그램인 '꿈꾸는 아리랑'(매일 오후 4~5시40분)은 다양한 음악과 국악계 소식을 전하는 시간으로 꾸며진다. 또 각 지역의 국악소식을 전하는 '꿈꾸는 아리랑'의 국악소식 通(통)을 통해 매주 월요일 김민경 아나듀서의 진행으로, 부산을 비롯한 김해와 양산시 일대의 다양한 국악소식을 생방송으로 전한다. 더불어 실황 음악 중계 프로그램인 'FM국악당'(매일 오후 7시30분~오후 9시)은 매주 금요일마다 부산을 비롯한 김해, 양산지역의 다양한 공연을 중계방송할 예정이다. 이 밖에도 부산국악방송은 전통음악방송에 걸맞게 부산국악원 내 연주소를 마련하고, 부산지역의 전통음악 확산에 다방면으로 기여도 할 계획이다. 부산 뉴시스 하경민 기자 ->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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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28
  • 창극의 스타와 판소리명창
    창극은 스타의 산실이었다. 초창기에는 판소리로 이름 높은 명창들이 창극을 시도했기 때문에 김창환·이동백·송만갑은 그 자체 스타이고 명창이었다. 정정열까지도 명창이 스타가 된 경우이지만 오태석은 조금 달랐다. 오태석은 판소리명창으로 보다는 창극의 스타로 유명했다. 그가 출연한 춘향전(방자역)이나 수궁가(원숭이역) 등에서는 관객들이 오태석의 연기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여성국극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박귀희·김소희(햇님·달님) 같은 스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후의 임춘앵이나 김진진·김경수도 명창이라기 보다는 스타성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반대로 임방울은 대단한 명창이었지만 창극에서는 스타가 되지 못한 경우이다. 하여 창극의 스타와 판소리명창은 약간 차이가 나는 개념이라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엮어 보기로 하겠다. 1962년 국립국극단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국립창극단이 만들어 질 때에는 영화나 TV 등 새로운 공연물이 늘어나면서 판소리와 창극이 극도로 위축된 시기였다. 이 무렵 김창구를 비롯한 국립극장 관계자들이 창극과 판소리를 함께 보호 육성할 방안으로 국립창극단을 만들었다. 김연수가 초대 단장을 맡고 당시 한 참 활동하던 김소희·박초월·박귀희·김경애·김득수·강종철·김정희·남해성·박봉선·박초선·임유앵·장영찬·정권진·한농선·한승호·허희 등이 단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몇 사람에 대해서는 창극과 판소리에 공헌한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우선 단장을 맡았던 김연수(1907~1974)에 대한 얘기부터 해 보겠다. 김연수는 일제강점기 ‘쑥대머리’ 한 방으로 스타가 된 임방울과 쌍벽을 이루며 창극과 판소리 두 분야에 크게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는 어려서 한문을 배워 유식한 편이었고 성격이 따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품이라 많은 일화를 남긴 사람이다. 29세의 늦은 나이에 순천의 성군수 집에서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배울 때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수궁가의 가사가 틀렸다고 우겨서 유성준이 그 곳을 떠나게 했다는 얘기가 유명하고 그 일 때문에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성악연구회에 출입하게 되었다. 이 무렵 조선성악연구회에는 정정열이 있어서 창극좌를 만들어 창극을 재건하고 흥행에 성공을 거둘 때인데 김연수는 그 단체에 끼어 활동하면서 본인도 나중에 정정열처럼 창극을 각색·연출·작창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겠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연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후에도 늘 지도자의 위치에서 단체를 운영하기도 하고 판소리를 새롭게 만들어 보려 애썼는데 그 결실의 하나가 국립창극단이 출범했을 때 단장이 되어 판소리를 창극으로 각색·작창·연출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판소리도 본인의 미학에 맞게 사설과 곡조를 다시 짜서 새로운 판소리를 만들었다. 본인은 춘향가만 발표했었고 나머지는 모두 오정숙이 차례차례 완창으로 발표했는데 수궁가를 완창하기 직전 김연수는 작고하고 말았다. 오늘날 동초제 판소리라고 하는 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 등은 오정숙이 공을 들여 퍼뜨려 전주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에 퍼져나가고 있는데 오정숙의 제자 이일주·조소녀·민소완(성준숙)·김소영 등이 거점이 되어 활발하게 전수하고 있다. 김연수는 토막창극을 재미있게 각색하여 무대에 올린 것으로도 유명한데 지금 그런 작품은 대부분이 전승되지 않고 있다. 판소리로 1964년 인간문화재가 되기도 했던 김연수는 판소리 작품 여러 바탕을 남겼고 많은 창극작품을 무대에 올렸던 초대 국립창극단의 단장이었다. 김소희(1917~1995)는 13~4세 때부터 소녀명창으로 당시 경성방송국에서 판소리 한 대목을 방송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1935년 콜롬비아레코드에 취입하기 위해 정정열 일행으로 일본에 갈 때는 일행이 정정열·이화중선·임방울·박록주·신숙·한성준이었으니 김소희가 최연소 10대 후반의 나이였다. 김소희는 송만갑·정정열·박동실 등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가곡과 거문고·가야금·양금 등을 배워 국악전반에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무엇이든지 잘 하면서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한문과 서예를 신호열선생에게 배워 서예작품이 국전에 3년이나 입선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이런 학습과 경륜을 가진 김소희였기 때문에 창극과 판소리에 기여한 공적 또한 적지 않다. 해방 후 여성국극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기폭제가 된 것은 박귀희와 김소희가 출연한 햇님·달님이라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실제 박귀희와 김소희를 모델로 하여 김아부가 대본을 만든 것으로 대중들의 대단한 성원을 받았고 박귀희는 남자역할로 굉장한 스타덤에 올랐었다. 박귀희를 실제 남자로 착각하고 사모하는 여성들이 줄을 이어 찾아다닐 정도로 유명했었다. 그처럼 여성국극 붐을 만들었던 김소희는 그 후 국립창극단의 여러 창극작품을 작곡하는 작창을 맡아 하기도 했다. 김소희가 한 일은 여러 방면에 걸쳐 참으로 다양하고 많다. 여성국악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했고 그들이 힘을 합쳐 국악예술학교를 만들고 이사장을 한 일이라든지 말년에 국악협회 이사장을 한 일 등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판소리의 격을 높이고 판소리를 국내·외에 선양한 일이라 하겠다. 해방공간에서는 건국의 핵심인사들과 미군정청 관계자들이 회식이라도 하게 되면 김소희·박귀희 등이 그런 자리에 나아가 판소리와 가야금병창을 들려주곤 했는데 그것이 한국의 문화를 알리는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었다. 또 1962년에는 한국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파리를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 공연했고 1964년에는 삼천리가무단의 일원으로 미국 여러 도시를 순회 공연했다. 1972년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는 판소리 연주도중 청중들이 기립박수를 할 정도로 크게 감동을 주기도 했는데 서울에 돌아 온 다음 나에게 “저들은 한국말을 모르면서도 판소리에 그처럼 감동을 받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그런 음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었다. 김소희는 명창으로서의 프라이드도 대단했다. 그는 13세에 판소리를 시작한 것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63세되던 1979년이 국악생활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한국 최초로 김소희는 국악생활 50주년 기념공연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최종민의 사회로 뜻 있게 잘 마쳤다. 그런데 그 후 김소희명창은 큰 무대에 서지 않으려 했다. 내가 왜 그러느냐고 말하면 “나는 명창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습니다. 내 소리가 나의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아 제대로 고음이 나지 않는데 나의 청중들에게 실망스러운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무대에 서지 않으려는 것이니 그리 아세요.”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깨끗하고 고고한 김소희명창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제자 복이 없다고 한탄 한 적이 있다. 제자들 중 오정숙은 김연수에게 가고 성창순은 정응민에게 가고 안향련·김동애·박소영은 고인이 되었다. 신영희·안숙선·박윤초·유수정·이명희·한정하·이영태·오정해·김미숙 등이 판소리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을 꼽으라면 박동진을 빼 놓을 수 없다. 박동진은 1975부터 1979까지 제2대 국립창극단단장을 한 명창이다. 박동진도 어린 시절은 판소리를 공부했지만 먹고 살 방도가 없어 지방의 소리선생이나 여성국극단의 반주악사(장구)등을 하면서 살았지만 1962년부터 1972년까지 국립국악원 악사로 있으면서 정력적인 판소리독공을 계속하여 최초로 대중을 상대로 한 흥보가 완창공연을 통해 판소리 중흥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68년에 흥보가를 5시간에 걸쳐 완창하고 ’69년에는 춘향가를 8시간 동안 완창으로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후 박동진은 언론이 주목하는 판소리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계속된 ‘70년 심청가(6시간),’71년의 수궁가(5시간), 적벽가(6시간)완창으로 그는 ‘73년에 판소리의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70년에는 성서판소리 ‘예수전’과 ‘팔려간 요셉’등을 발표하여 한국기독교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했다. 이 후 ‘성웅 이순신’ 같은 장편의 서사시는 직접 사설을 짓고 작창 하여 녹음하는 등 판소리 역사에 빛나는 업적을 많이 남겼다. 판소리를 들으러 오는 청중이면 어떤 청중들이라도 쉽고 재미있게 판소리를 감상할 수 있도록 현장에 맞는 소리를 척척 만들어 불러주는 창조능력을 가진 명창이었다. 청중을 울리고 웃기는 능력을 충분이 가지고 있었던 명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대에서 즉흥적으로 가사를 만들고 내용을 꾸려서 멋지게 전달하는 실력은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최고의 명창이었다. 박동진에 버금가는 여류명창으로는 오정숙(1935~2008)을 꼽을 수 있다. 박동진이 완창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자 오정숙도 판소리 완창에 도전하게 된다. ‘72년에 춘향가, 73년에 흥보가, 74년에 수궁가, 75년에 심청가를 완창했는데 여류명창이 이처럼 여러 바탕의 판소리를 완창으로 발표한 것은 오정숙이 최초이다. 박동진이 본인의 판소리를 발표했다면 오정숙은 그의 스승 김연수의 작품을 발표한 것이 다를 뿐이다. 이 판소리들은 오늘날 김연수의 호를 따서 동초제 판소리라 부르고 지금 전주를 중심으로 오정숙의 제자들이 잘 전수하고 있다. 오정숙은 1977년부터 90년대 말까지 20여년 국립창극단에 있으면서 많은 배역을 멋지게 해 내었지만 특히 춘향가의 월매 역은 따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연기를 보여주는 명배우였다. 소리와 연기가 모두 완벽에 가까울 정도 야무지게 활동했던 명창·명배우였던 분이 바로 오정숙이라 할 수 있다. 조상현도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으로 빼 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1939년생인 그는 1971부터 1982까지 국립창극단에 있었고 늘 주연을 하며 창극의 대중화에 기여했었다. ‘70년대 말에는 MBC. TV에 창극 프로그램을 만들어 계속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그는 한국 최고의 명창이다. 정응민에게 배운 판소리 춘향가·심청가·수궁가를 주로 부르고 박녹주에게 배운 흥보가를 부를 수 있긴 하지만 정응민이 흥보가를 부르지 않아서인지 조상현도 흥보가를 자주 부르지는 않는다. 그의 장기는 춘향가·심청가·수궁가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떤 청중이라도 “야 - ! 판소리가 참으로 멋있구나.” 할 정도로 감동을 줄 수 있는 명창이다. 발성이 완벽에 가깝고 세세상청을 통성으로 낼 수 있는 유일한 명창이다. 배운 판소리의 작품성이 높기 때문에 본인이 손 댈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본인의 생각(미학)이 멋대로 뜯어고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배운 그대로 부르는데 완성도가 높은 판소리를 부른다. 그는 광주광역시 국극단을 만들어 오래 단장으로 있었고 사단법인 판소리보존회 회장으로 역시 오래 활동했다. 다른 명창들처럼 판소리를 개인지도형식으로 한 사람씩 가르치는 교수보다는 다수를 모아놓고 그룹지도처럼 가르치는 강의 식 판소리 교습으로 유명한데 그렇게 가르친 제자들이 수 백 명에 이른다. 조상현은 판소리명창으로 최고의 명창이지만 창극의 배우로서도 최고의 배우라 할 수 있다. 춘향전의 이도령역이나 심청가의 심봉사역을 특히 잘 하고 무슨 역이든지 척척해내는 명배우이다. 내가 국립창극단 출신의 명창들을 몇 사람 소개하는 것은 지금의 후학들이 이런 선배들의 여러 가지 특징 중에 무엇이라도 참고하여 각자의 미래를 더 훌륭하게 설계하고 더 열심히 공력을 쌓았으면 하는 소망이 있어 소개하는 것이다. 지면관계로 너무 간략하게 다룬 것을 죄송하게 생각한다.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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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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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애란 - 판소리 (전남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 안애란 프로필 (1943년 전남 나주 출생, 본명 안부덕) 사진 전공ㅣ분야 판소리 수련과정ㅣ학력 장월중선, 정응민, 성우향 선생 사사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9-2호 동편제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활동 경력 목포시립국악원 판소리 교수 역임안애란판소리전수소 (전남 목포시) 대표 수상 경력 1994년 전국판소리명창경연대회 대상 (대통령상)2021년 국무총리 표창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https://youtu.be/7FpLGb_LtIM [안애란 명창의 옛날 판소리 이야기]https://youtu.be/tpstGpZZjEg [판소리 명창 안애란 회고담] 기타 요절한 비련의 명창 '안향련'과 사촌이다. 오정해, 박애리, 현미, 정승희, 이연정 등 수많은 소리꾼들을 가르쳤다.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사,아,자,차
    2021-12-31
  • 오정해 - 판소리, 배우
    ☆ 오정해 프로필 1971년생 사진 전공ㅣ분야 판소리, 영화배우, 방송인 수련과정ㅣ학력 안애란 선생 사사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졸업중앙대학교 한국음악과 (판소리전공)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악예술학 석사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동양예술학 박사 활동 경력 1992년 미스춘향 선발대회 진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송화 역으로 출연 동아방송예술대학 예술학부 공연예술계열 전통연희전공 교수 2014 완도국제 해조류박람회 홍보대사 수상 경력 1983년 전주대사습 장원(학생부) 1987년 동아국악콩쿠르 학생부 은상 1991년 서울국악경연대회 1등제14회 청룡영화제 신인여우상 - 서편제 제31회 대종상 신인여우상 - 서편제제1회 상해국제영화제 최우수여우주연상 - 서편제제29회 낭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 천년학 홈페이지ㅣSNS 동영상 보기 ▶ http://youtu.be/LxV0mUEunxs [진도아리랑] 기타 ◆ 본 국악인 프로필은 공개된 내용을 수집, 정리한 것으로 잘못된 정보를 포함할 수 있습니다. 내용 수정 및 사진 교체, 혹은 삭제를 원하시는 경우에 연락 주시면 즉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 국악인프로필
    • 사,아,자,차
    201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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