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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전통음악과 교회예배음악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1. 무엇이 문제인가? 1995년 추수감사절에 나는 강원룡목사님의 부탁으로 경동교회 옥상에서 저녁 음악예배를 국악으로 드린 적이 있다. 그 때 기악으로는 시나위 합주를 했고 박동진 명창이 흥보 박타는 대목을 판소리로 했었다. 나는 사회를 하면서 추수감사절 음악예배를 이끌었는데 강원룡목사님의 말씀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말씀 중 그날 예배에 참석한 외국 교회지도자 4분이 있었는데 낮 예배는 각자 마음대로 서울시내 교회에 가서 보고 오라고 했더니 모두 다녀와서 하는 말이 “한국교회는 설교나 기도는 한국말로 잘 하면서 찬송이나 찬양은 왜 한국음악으로 하지 않고 서양음악으로 하느냐?”하고 묻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 우리교회(경동교회)의 음악예배를 보시오 한국음악으로 예배를 드릴 겁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배를 다 본 다음 그 외국 목사님들이 국악으로 드린 그 예배에서 크게 감동 받았다고 하면서 그 녹음을 꼭 가져가게 해 달란다는 말까지 했었다. 1980년대 어느 해였다. 그 때도 강원룡목사님이 세계찬송가집에 넣을 한국적인 찬송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여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위원회를 만들어 토론과 워크샤프를 한 적이 있다. 세계찬송가집에 한국 찬송가가 한 곡도 들어가지 못해서 이유를 물었더니 “한국인이 작곡한 작품이 제출되긴 했지만 그 작품의 음악언어가 서양음악언어로 되어있어서 빼버렸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찬송가의 자격이 있는 한국적인 찬송가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외국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한국교회의 찬송가나 찬양음악을 한국교회 구성원들은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한국말로 된 가사와 그 가사를 표현하는 곡조가 맞지 않고 그 곡조를 표현하는 창법이 또한 어울리지 않는데도 그냥 묵인하고 넘어가고 있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국악 식으로 하는 것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향까지 있다. 선교사들이 가르쳐 준대로 부르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고 말할 수도 있고 우리가 불편하지 않은데 뭣이 문제가 된단 말이냐?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 예를 든 사례와 같은 문제가 분명 있으니 우리도 그 문제를 제대로 살필 수 있어야 된다. 2. 음악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한국의 성악가들이 독일에 가서 독일 성악가들과 회합을 가졌을 때 독일 성악가들이 한국성악가들에게 한국가곡을 한 번 해보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한국 성악가가 나가서 “누구의 주재런가 맑고 고운 산 -”하고 부르니까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아니 그런 노래 말고 한국가곡을 불러 주세요.”하더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한국성악가가 나가서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하고 노래해도 역시 끝나기 전에 “그런 노래하지 말고 한국가곡을 해 주세요.”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가서 “날 좀 보소오 날 좀 보소오”하고 민요를 부르니까 “아! 그 노래 참 좋다”고 하면서 다른 노래(한국가곡)를 또 해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독일 성악가들은 한국의 가곡이 어떤지 민요가 어떤지를 전혀 모르지만 척 들으면 가사와 음악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고 보면 된다. 바꾸어 말하면 독일 성악가들은 척 들으면 아는 음악언어의 문제를 한국 성악가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 교인들이 어찌 음악언어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모르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우리네가 음악을 배운 것은 학교와 교회에서다. 이 땅의 학교교육은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시작되었다. 식민지인을 양성하는 것이 교육목적에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역사와 우리문화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역사는 왜곡해 가르치고 음악 같은 우리문화는 아예 가르치지 않았다. 그 식민지 교육의 효과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우리음악은 계속 교육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한국음악언어가 단절되다시피 되었다. 전통시대에는 저절로 배워 노래할 수 있었던 우리음악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교과서에서 영국 미국 독일 이태리 민요 중심으로 배우며 그 음악언어를 익혔고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 역시 그런 음악언어로 되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서양민요언어에 익숙하게 되었다. 그런 음악언어를 익힌 젊은이들이 만들어 보급한 대중가요를 포크가요라 하는데 그 포크의 의미는 서양민요를 가리키지 한국민요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 만큼 우리 음악언어가 우리생활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우리음악언어가 완전히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지만 변칙적으로 남아있다.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를 때 보면 “하늘가는 밝은 길이”를 악보대로 강약을 지켜 부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아늘 가아느은 바앍은 길이”와 같이 목을 써서 시김새를 하고 가사를 꾸며 부른다. 그런 부분은 우리말 가사를 제대로 발음하기 위해 그런 우리민요 창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된다. “주의 주실 화평 믿은 얻기 위해”를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주우에 주우실 화아평 미이듬 어얻기 위이해”처럼 처음을 강박으로 시김새를 하면서 부른다. 누가 그렇게 가르친 것도 아닌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국식으로 부른단 말이다. 이처럼 음악언어란 말을 자연스레 표현하는 가운데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다. 말이 다르면 음악언어가 다르다. 같은 우리나라 안에서도 사투리가 다르면 민요의 표현방식이 다르다. 말하자면 사투리에 따라서도 음악언어는 조금씩 다르게 발달한다. 전라도 민요와 경상도 민요가 다르고 평안도민요와 전라도 민요가 많이 다른 것은 사투리의 차이 때문이라 생각해도 된다. 그 민요가 다르다는 것은 곧 음악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21세기는 문화의 시대여서 문화언어를 발전시키는 정책을 펴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문화언어에는 음악언어 무용언어 연극언어 등이 있을 수 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우리 음악언어를 발전시켜야 된다. 우리음악언어가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전통음악에 들어있다. 판소리의 음악언어도 있고 민요의 음악언어도 있다. 물론 가곡이나 궁중음악의 음악언어도 있다. 우리네 음악언어는 아주 다양하게 발달해 있기 때문에 배우기 어려운 것은 단점이지만 종류가 많다는 것 자체는 큰 장점일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다양한 음악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발전시켜야 된다는 주장을 할 수 있다. 3. 한국 음악언어로 된 교회음악을 발전시켜야 된다. 나는 한국의 종교음악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무속음악도 연구했고 불교음악이나 유교음악도 연구했다. 실제 음악과 접할 수 있는 체험도 많이 했다. 나는 2004년 아시아전통예술페스티벌 조직위원장이 되어 아시아 여러 나라의 무속들을 초청하여 3일간 남산한옥마을에서 축제형식으로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느끼고 많은 사람과 이야기 한 것은 우리나라 무속의 음악과 다른 여러나라 무속음악은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우리나라 무속음악의 수준이 월등히 높고 특징도 확실했다. 속되게 표현하면 우리 것과 다른 나라 것은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우리 것이 우수했다. 불교음악에서도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2006년 11월 마산에서 아시아 불교음악 페스티벌을 한 적이 있다. 중국, 대만, 일본의 불교음악 공연단과 한국의 범패승들이 공연형식으로 자기나라 불교음악을 발표했다. 중국은 중국식으로 불교음악을 하고 대만이나 일본 역시 자기나라 식으로 했다. 헌데 역시 한국의 불교음악과 춤이 훨씬 좋았다.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음악이나 춤 같은 예술장르는 그 자체로 예술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예술성에서 우리 것이 우수하다는 말이다. 유교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동양에서 유교를 하는 나라는 중국, 대만, 베트남, 일본 그리고 한국이고 이 나라들은 다 유교의 의식음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제일 오래되고 유교음악의 이론에 맞게 잘 연주되고 있는 것은 한국의 문묘제례악이다. 세종 때 작곡한 문묘제례악은 중국 유교음악의 모범으로 평가되어 춘추 석전을 모실 때면 그 내용을 중국 전역에 중계하느라 난리를 피운다. 나는 이런 예를 볼 때마다 한국의 기독교음악을 한국음악언어로 잘 발전시킨다면 수준 높은 한국기독교음악을 창조하여 세계기독교음악의 한 부분을 멋지게 장식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4.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첫째 음악언어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편견을 없애는 일부터 해야 된다.지금과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한국적인 교회음악을 시도조차 할 수 없다. 내가 새문안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있었던 ‘80년대 전반만 해도 교회에서 징이나 장구를 사용할 수 없었다. 악기는 음악 하는 도구이지 다른 의미가 없는데 마치 그 악기에 무슨 귀신이라도 붙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유럽의 미사곡이나 성가를 번역해 연주하면 미국출신의 장로는 그것을 싫어하면서 미국에서 출판되는 미국산의 성가를 가져와 번역해 쓰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성가를 대하는 태도에도 내쇼날리즘이 있다는 것을 느꼈었다. 교회의 저항이 어느 정도 사라진 다음에야 우리음악언어로 된 찬송가나 성가를 개발하여 부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제일 앞에 거론한 것이다. 둘째 기존의 우리민요를 찬송가 곡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 보자.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서양민요가 적잖게 포함돼 있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민요를 찬송곡조로 사용해 보자는 제안이다. 예를 들어 좀 경쾌한 ‘경복궁타령’의 곡을 찬송가로 만들었을 때 어떤 식이 될까? 후렴을 “영광 영광 할렐루야”로 하고 메기는 소리는 편리한 대로 찬송가 493장을 그냥 메겨도 된다. 경복궁타령은 메기는 부분과 후렴부분의 선율이 같기 때문에 493장을 그냥 경복궁타령 곡조로 계속 불러도 무방하다. 493장 (이호운 작사)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 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후렴)영생을 맛보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민요를 사용하는 경우 전라도에서는 전라도 민요를 활용하고 강원도에서는 강원도민요를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가사는 그 곡조에 어울리는 것으로 작사해 사용해야 자연스럽고 부르기 좋다. 셋째 잡가를 활용한 고급 성악곡을 개발하는 방안 전통음악에는 소리를 전문으로 하던 소리꾼들의 노래 잡가가 다양하게 발달해 있다. 이런 노래를 활용하여 성가를 개발하면 합창이나 독창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성가를 많이 만들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넷째 판소리의 음악언어를 활용하여 기독교적인 내용을 판소리 작품으로 개발하는 방안. 이 방법은 이미 박동진 명창이 ‘예수전’이나 ‘팔려간 요셉’을 통해 그 예를 보여 주었다. 또 김형철이 같은 방법으로 ‘모세뎐’을 창작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이런 방법은 교인들이 판소리의 내용을 쉽게 알아들을 수 있고 소리 자체에서 재미도 느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자주 들려주어 익숙하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직 교회에서 판소리하는데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이미 세계무형문화유산이 된 인정된 음악이다. 이런 음악언어를 우리 기독교가 활용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어서 권장하고 싶다. 다섯째 한국음악언어를 활용한 새로운 교회 예배음악을 작곡하는 것. 지금 단계는 우리 음악언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작곡가가 거의 없고 또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기존의 세련된 음악을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권했다. 하지만 노하우가 축적되고 우리음악언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단계가 오면 다양한 한국기독교예배음악을 작곡해 써야한다. 찬송가도 한국음악언어로 만들고 성가도 한국적인 것으로 만들고 성극의 음악도 판소리나 민요를 이용한 뮤지컬 식으로 만들면 좋을 것이다. 5. 한국적인 한국의 기독교음악을 위하여 한국적인 한국의 기독교음악은 한국음악언어로 된 한국의 기독교음악이어야 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고 개념의 정리 자체가 그러해야 한다. 서양음악언어를 쓰더라도 한국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으면 한국적인 기독교음악이 된다는 식의 논리는 그 동안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한국기독교음악의 정체성은 음악언어가 좌우하고 한국의 음악언어로 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한국의 기독교음악을 창출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부터 생각을 바꾸고 실천할 수 있는 쉬운 단계부터 하나씩 실천하는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 기존 찬송가 곡조를 한국식 시김새를 써서 부르는 것을 허용하고 우리민요를 찬송가 곡조로 활용하는 시험을 꾸준히 해 보아야 한다. 우리민요의 메기고 받는 식을 활용하여 인도자가 즉흥적으로 메기고 교인들이 뒷소리를 받게 하면 아주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잡가를 활용한 성가대 용 성가도 개발하고 성서판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게 하여 수준 높은 한국적인 교회음악에 귀가 훈련되도록 하는 노력도 꼭 했으면 한다. 日新又日新 이라 했던 믿음의 선배들이 한 말처럼 우리의 생각을 계속 새롭게 바꾸어 가면서 우리음악이 우리기독교음악의 어머니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야겠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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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10
  • 아우라지 - 정선아리랑의 대표적인 발상지
    아우라지는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정선아리랑의 대표적인 발상지로서 오대산에서 발원되어 흐르는 성천과 임계 중봉산에서 발원되는 골지천이 합류되어 흐른다 하여 아우라지(어우러지)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자연적인 배경에서 송천을 양수(揚水), 골지천을 음수(陰水)라 부르며 여름 장마 시 양수가 많으면 대홍수가 예상되고 음수가 많으면 장마가 끊긴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남한강 1천리 물길 따라 목재를 서울로 운반하던 유명한 뗏목터로 각지에서 모여든 뗏사공의 아리랑 소리가 끊이지 않던 정한이 그윽한 곳 이였으며 특히 대원군의 경복궁 중수시에 목재를 서울로 운반하던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뗏사공과 행상을 위하여 객지로 떠난 님을 애닯게 기다리는 마음과 장마로 인하여 강물을 사이에 두고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남녀의 애절한 한스런 사연이 지금에 전해지는 아리랑으로 산간마을 주민들의 소박한 생활 감정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또한 아우라지 강변에는 조상의 한과 얼이 얽힌 내용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아우라지 처녀동상이 건립되어 있고 아우라지 나룻터가 원형 보존되어 떠난 임을 기다리는 애절한 사연을 싣고 지금도 아리랑 가락 속에 유유히 오가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 나룻터는 근대 교통로가 발달되기 이전에는 구절천 동쪽과 서쪽지방을 연결해 주는 주요 나룻터였으나, 정선선 철도(증산-구절)가 개통되고, 42번 국도와 구절리와 여량리를 연결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나루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었으나 정선아리랑 발상지로서의 역사적인 보존을 위하여 장기적인 계획으로 주변 관리에 힘쓰고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남녀의 애환이 담긴 "정선아리랑"의 주요 발상지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지명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강 건너에 아우라지 비, 처녀상, 정자(여송정)를 건립, 정선아리랑의 발상지임을 전하고 있다. 정선아라리의 발상지로 전해지는 정선군 북면 유천리 산 128번지, 아우라지 나룻터 건너편 야산에 구전되던 아우라지 강변에 얽힌 처녀 총각의 애절한 이야기를 전하기 위하여 여송정을 세우고 그 앞에 강물을 바라보며 떠난 님을 애절하게 기다리는 듯한 처녀상이 건립되어 있다. 처녀상 옆에는 동상 건립 취지문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송천(松川)과 골지천(骨只川)이 어우러지는 아우라지다. 여기서부터 남한강(南漢江) 1천리 물길을 따라 처음 뗏목이 출발한 곳으로 정선아리랑의 숱한 애환(哀歡)과 정한(情恨)을 간직한 유서(由緖) 깊은 곳이다. 또한 뗏목을 타고 떠나는 님과 헤어지던 곳이며 강을 사이에 두고 사랑하는 님을 만나지 못하던 애절한 사연을 담아 불리워진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네 주게.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라는 정선아리랑이 전해져 오는 곳이다" 자료출처 : 문화컨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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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02
  • [PDF] 판소리 발성법의 특성
    ↑ 다운로드 받으세요 권오성 : 한양대학교 명예교수 이 논문은 판소리 발성법에 대한 내용으로 북한에서 창극 활동을 하던 조상선의 발성법을 중심으로 판소리 발성의 특성에 대하여 논의한 것이다. 요즘 남한에 명창들이 하는 것과는 달리 조상선은 판소리의 수업 과정에서 학습 초기부터 장단을 연습시킨 다음에 , 순으로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호흡 및 목풀이 훈련에서는 아침 일찍 누워있는 채로 약 10분간 호흡 훈련을 시키고, 아주 작은 소리부터 시작해서 점차 큰 소리로 등 목의 작용과 성(聲)의 훈련을 시켰다. 그 다음 악보에 의한 발성훈련에서는 오선보로 된 악보를 제시하며, 그 악보를 이조해 가면서 훈련시켰다. 그리고 호흡 및 목풀이 훈련, 독공과 득음, 또한 발성과 창법 문제, 성음 작성과 성악 강의 설치 마지막으로 창법에서 제기되는 특수 예를 중심으로 훈련시키는 내용이다. 그리고 창극과 관련해서 신인 육성 문제에 대하여 조상선 나름으로의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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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02
  • 국악가요란 ?
    신민요·창작민요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국악어법으로 창작한 대중가요의 하나이다. 국악가요의 원천인 신민요라고 하는 창작민요는일제강점기에 <진도아리랑>·<도라지타령>·<노들강변>·<천안삼거리> 등에서부터 시작한고 볼 수 있으며축음기의 출연과 함께 일본 레코드사에서는 신민요와 <장한몽>·<시들은 방초> 등의 유행가를 함께 취입하여 1930년대유행시켰는데 이로 인해 유행가와 혼동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음악체계와 팝송의 유입으로 민요는 전문국악인에게만 남고, 유행가는 민요적 요소를차차 잃어 완전히 서양식 어법으로 변했다. 그 후 창작민요는 거의 없었는데 1970년대부터 국악가요에 가까운 국악민요가 다시등장하기 시작했다. 김영동의 <누나의 얼굴>·<개구리타령>을 비롯해 변규백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김민기의 <가뭄>과 같은 노래를 그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본격적인 민요의 작곡은 1984년 ‘민요연구회’의 발족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민요연구회는 민요의 발굴·창작에서 확산·보급까지 ‘민요운동’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김용수의 <저놀부 두 손에 떡들고>, 김석천의 <남도의 비>, 이정란의 <엉겅퀴야>, 이성재의 <고향생각> 등이 이시기에 만들어진 노래이다. 이렇게 이루어졌던 국악가요의 창작과 활성화는 1987년 11월 KBS국악관현악단에서 발표한 국악가요를출발로 서울시국악관현악단이나 국립국악원, 국립국악관현악단에서도 국악가요 공연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국악의 대중화를 꾀하는‘국악가요 공연’은 대중가수들과 협연을 시도하기도 하고 국악기로만 구성된 전문연주단의 활동 등 다양한 형태로 변화·발전하고 있다. 자료출처 : 정창관의 국악음반 길라잡이 .......................................................................................................... 정의 국악의 장단이나 가락을 살려 대중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만든 민요풍의 창작가요. 개설 민요풍의 노래로서 국악의 생활화와 대중화라는 당시의 시대적 과제와 연관되어 1980년대에 부상한 새로운 국악 갈래이다. 「어디로 갈꺼나」, 「한네의 이별」, 「삼포가는 길」, 「꽃분네야」, 「산도깨비」 등이 국악가요에 속한다. 연원 및 변천 국악가요의 연원은 일제강점기 민요풍의 대중가요였던 신민요에서 찾아진다. 당시 신민요는 특정 작곡, 작사자에 의해 짧은 유절 형식의 민요풍 가요로 만들어져 양·국악 혼합합주(일명 鮮洋合奏)에 의해 반주되면서 대중들에게 현대적인 민요로 유행되었다. 국악가요는 1970년대 후반 국악계 안팎에서 소규모 양·국악 혼성 실내악단에 의해 반주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로서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는 퓨전국악의 대중화로 인하여 그 하위 갈래로서 민요의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자리잡았으나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쇠퇴일로에 있다. 내용 국악가요의 원천에 해당하는 민요풍의 창작가요는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주류 장르 중 하나였던 신민요에서 시작한다. 〈노들강변〉, 〈처녀총각〉, 〈조선팔경가〉 등 민요양식과 유행가 양식이 혼합된 노래들이 1930년대에 크게 유행하여 신민요라는 갈래가 당시 성행하였다. 그러나 해방이후 창작민요는 전문 국악인들의 창작 및 가창 전승을 통해 기존의 통속민요와 함께 전문 국악인의 레퍼토리로 편입되었고 민요양식과 결별한 한국대중가요는 미국식 대중음악어법에 점점 더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70년대 들어 국악계와 대중음악계, 그리고 민중가요 진영 사이의 교차적 틈새 영역에서 국악가요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김영동은 국악가요를 연 초기 작곡가로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1978년 12월 국립극장에서 발표된 〈누나의 얼굴〉, 〈개구리 소리〉 등은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운동 혹은 민중가요의 영향을 받은 노래로서 민요풍의 운동가요로 유행되었고 영화주제가 〈조각배〉,〈어디로 갈꺼나〉, 연극 삽입가요 〈사랑가〉, 〈한네의 이별〉, TV주제가 〈삼포 가는길〉 등은 국악가요의 대중성을 확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영동의 작업을 이어받아 국악가요가 국악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정착하게 된 데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 활동의 힘이 컸다. 가야금, 피리, 기타, 해금, 소금, 신디사이저 등 당시 새로운 양·국악 혼성 편성으로 구성된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은 1990년대 초반까지 김영동, 채치성, 조광재 등의 창작곡을 연주하면서 방송프로그램 출연과 음반작업, 라이브 공연을 통해 국악계에 ‘국악의 대중화’, 혹은 ‘생활화’라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슬기둥의 대표곡으로는 〈꽃분네야〉, 〈산도깨비〉,〈소금장수〉, 〈황톳길〉 등이 있다. 초창기 국악가요는 대편성 기악음악위주의 창작국악과 달리 짧고 단순하여 따라 부르기 쉬운 동요나 민요풍 노래 위주로 되어 있고 대금, 가야금 등의 전통선율악기와 기타 및 신서사이저의 서양화성악기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밴드의 반주를 포함하였다. 국악가요의 이러한 반주 편성은 이후 퓨전국악 밴드의 모체가 되었다. 국악가요는 음악회장외에 방송 및 음반과 같은 대중매체에 대한 친화력이 강하고 주요 수용층을 젊은이로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당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국악가요가 대중화되면서 국악관현악단에서 국악가요 공연을 주최하는 등 국악계 제도권에 진입하여 대편성 국악관현악단에서도 국악가요를 수용하였다. 의의와 평가 국악가요는 그간 소수 매니어 혹은 노년층에 제한된 국악의 수용층을 넓히고 국악의 활로를 방송 및 음반, 청소년 음악회 등으로 새롭게 넓히는 등 국악의 대중화 및 현대화라는 1980년대의 시대적 과제에 충실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단조·장조 오음음계의 틀에 박힌 선율과 초보적인 3화음, 유절형식의 서정가요라는 초기의 정형화 된틀에서 진화하지 못하고 가사에 있어서도 토속적이고 의고적·감상적인 이미지를 고착화시킴으로써 이후 시대 변화에 맞추어 자생적으로 변신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이소영의 음악비평· 생존과 자유』(이소영, 민족음악연구회, 2005)『한국음악의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소영, 민속원, 2005)「퓨전국악의 대중화:국악의 대중화와 대중음악화 사이에서」(이소영, 『대중음악』 통권1호, 한울, 2008) 자료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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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02
  • 국악의 미래를 위하여 - 최상일: MBC '한국민요대전' PD
    2011.11.9 국립국악원 설립 60주년 기념 학술회의에서 제가 발언한 내용을 몇 부분으로 나눠 연재합니다. 저는 3부 종합토론의 토론자 5인 중 한 사람이었고, '국악계의 청년 일자리 창출'이 주제였습니다. 저는 국악계의 일자리 창출은 결국 국악의 활성화를 통해 달성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아서, 제가 평소에 생각하던 국악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원인과 해결방안을 나름대로 제시하였습니다. 발언했던 내용을 간추려서 올립니다. 최상일----------------------------------------- 국악의 현황 국악이 활성화되지 못하는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먼저 국악의 현황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악을 둘러싼 여건은 상당히 좋아지고 있는데 국악은 아직 울타리 안에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국내 여건은 많이 좋아졌다 먼저 문화적 수요라는 측면에서 보면, 국민소득이 증대하고 여가가 늘어나면서 문화에 대한 수요도 커지고 있다. 경제위기 등으로 정체와 퇴보의 시기도 있지만, 문화적 욕구의 증대라는 대세는 거스를 수 없을 것이다. 생존에 급급하던 시대에서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국악에 대한 인식도 갈수록 우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여러 분야에서 우리의 것, 토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확산되면서, '우리의 소리'로 대변되는 국악에 대한 인식도 좋아지고 있다. 식민지시대와 개발시대를 겪은 나이든 세대가 전통문화를 멀리할 수밖에 없는 세대였지만, 오늘날 젊은 세대는 우리 소리에 대한 편견이 없다. 오히려 그동안 먼지 속에 묻혀있던 보물을 발견하듯 국악을 재발견하는 재미에 눈을 뜨고 있다. 제도적 측면을 보아도 우호적이다. 서구 선진국에는 못미치지만, 문화산업에 대한 공공적 지원은 확대되고 있으며, 예술경영 전문인력도 많이 배출되고 있다 국악 전문 방송채널 생겨난지 오래이며, 지역축제 활성화, 지방 국악원 신설 등등, 제도적 여건이 매우 좋아진 것은 분명하다. 국외 여건도 좋아지고 있다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올림픽, 월드컵, 김연아 등으로 잘 알려진 한국의 문화에 대한 세계인의 호기심이 크다. 이것이 이른바 한류 바람의 원인이다. 그러나 이 한류 바람을 엉뚱하게도 외국 모방 조립품이라 할 만한 '케이팝'이 독차지하고 있다. 자본의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해외 음악시장을 보면, 정체된 서양 고전음악(클래식음악)이나 획일적인 팝음악의 대안으로 '월드뮤직' 시장이 확대되는 모습이 주목된다. 국악이 진출할 수 있는 해외시장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국악은 해외 시장에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국악은 국내에서도 다른 음악에 비해 열세다 감상용 음악시장에서는 여전히 서양 고전음악이나 서양팝이 우세하다. 서양 고전음악은 검증된 완성도를 무기로 삼고 있으며, 서양팝은 여기에 대중성을 더했다. 대중음악 시장에서는 대중가요나 K-POP에 비해 국악이 현저한 열세다. 국악은 한정된 시장, 일종의 틈새시장에서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자립 기반이 약해 공공 기금에 의존하는 양상이다 국악계의 인력구조에 포화현상이 뚜렷하다 국악전공자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고 정체되는 양상.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고 있는 것. 들리는 바에 의하면, 1년에 국악전공 졸업자가 800명씩이나 배출된다고 한다. 학교가 너무 많아진 것이다. 현재 국악계의 인력은 국악단, 국악관현악단 등에 취직하여 월급을 받는 중장년층과 그렇지 못한 청년층으로 양분되는 양상이다. 악단의 인력은 이미 포화되어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 자리가 날 뿐이어서, 악단에 들어가기 위한 구직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그러는 한편으로, 악단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일부러 들어가지 않은 청년들이 밴드를 꾸려 새로운 시장을 개쳑하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악단에 들어가 월급쟁이가 되는 순간부터 음악가로서의 생명을 잃는다는 생각을 하는 청년들이 있어서, 이들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다. 국악전공자들이 방송직이나, 작가, 기획자 등으로 직업의 다변화를 꾀하는 양상도 주목할 만하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음악의 내용으로 보는 국악의 현황은 어떤가? 여건이 어떠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음악 그 자체다. 국악의 내용은 충분히 만족스러운가? 아니다. 전통음악은 그대로 답습되기만 할 뿐, 새로운 창작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기서 창작이란 기존 장르 안에서의 창작을 말한다. 예컨대, 국악 명곡인 수제천과 비슷한 편성과 분위기로 새로운 악곡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국악 명품 장르인 산조의 틀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새로운 산조를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시나위, 풍물, 판소리, 민요, 가곡 등 모든 장르의 예술성을 인정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창작을 익숙하게 해내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다. 국악의 여러 장르는 다 존재 이유가 있어서 형성된 것이고, 누대에 걸쳐 검증된 장르다. 기존 장르를 버려야만 새로운 곡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창작국악의 큰 갈래인 국악관현악은 어떠한가? 국악관현악곡은 안타깝게도,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예술적 감동을 거의 주지 못한다. 국악관현악단은 그 탄생에서부터 발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상식이다. 물론, 웅장한 사운드를 위해서 관현악곡을 써야할 수도 있다. 그럴때에도 국악기의 특성을 충분히 고려해서 곡을 써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지금대로라면, 국악관현악에서 국악 발전의 돌파구를 찾기는 어렵다. 현재 많은 인재들이 국악관현악단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국악관현악의 정체가 국악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원인일 수도 있다. 요즘 가장 활발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소편성의 창작국악은 어떠한가? 소편성 창작국악은 다양하고 대중적 경쟁력이 있는 효율적인 장르임에도, 국악으로서의 정체성 부재와 완성도 미흡으로 대중의 지지를 충분히 얻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퓨젼국악'이 가장 큰 논쟁거리다. 퓨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화는 어떻게든 서로 섞이게 돼있다.문제는 섞는(섞이는) 방법이다. 오랜 세월동안 자연스럽게 섞인 음악은 오히려 예술성이 높아지지만(중남미 음악의 예), 음악의 원리를 모르고 섣불리 잘못 섞은 음악은 듣는 이에게 괴로움을 준다. 퓨젼이 '국악퓨젼'일 수 있으려면, 어떤 형태로 퓨젼을 하든 국악의 본질을 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퓨젼국악이라고 하는 곡들을 들어보면 전혀 국악의 요소가 들어가지 않은 음악들이 많다. 국악기를 썼다고 해서 국악의 요소가 들어간 거라고 주장한다면 더 이상 할 얘기가 없다. 음악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의 본질이 악기에 있지 않다는 것은 상식이다. 만약에 대금으로 뽕짝을 연주하면 그것이 국악인가, 뽕짝인가? 결론적으로, 국악을 둘러싼 제반 여건을 좋아지고 있는데, 국악은 좀처럼 우물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국이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잘못의 원인을 알고 해결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앞서 국악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여건은 좋아지고 있는데 그것을 좀처럼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국악이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훌륭한 예술이 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무엇인가? 국악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요소가 국악계에는 너무 많다. 교육, 연구, 비평, 인습, 모두가 문제다. 국악교육의 문제 국악과 학생들 중에는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부모의 강요로 국악을 전공하게 된 경우가 많다. 억지로 국악을 하게 된 학생들에게 음악에 대한 내적 욕구가 부족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초등학교 음악교육이 서양음악 위주로 돼있는 것도 국악에 소질이 있는 학생을 조기에 발견하지 못하는 원인이다. 중고교 국악교육이 입시 위주의 주입식 실기교육에 쏠려있는 것이 문제다. 이름있는 대학에 붙는 것만을 목표로 해서는 진정한 음악교육이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음악 교육이라면 기본적으로 음악가에게 필요한 철학, 미학, 인문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생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음악을 왜 하는지,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학생들이 많다. 전통음악에 관한 이론 교육도 부족하다. 악기 연주만 기계적으로 가르칠 뿐, 우리 음악의 원리와 미학, 장르의 특성 등에 대해서는 깊이 가르치지 않는다(못한다). 우리 전통음악의 음계, 선법, 장단, 시김새, 전조, 말붙임새 등에 관한 이론이 정립되어 있지 않고, 교육도 되지 않는다. 우리 토속민요에 관한 연구는 자료가 부족하지 않음에도 아직도 지지부진하다. 민속음악 전반에 대한 연구가 미흡하다. 반면에 서양음악 기초이론은 초등학교때부터 누구나 배우고, 피아노학원 등에서 과외로 더 배운다. 화성이론이 대표적이다. 연주자들의 경우, 창작교육이 전혀 안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연주자들은 악기 연주 외에 창작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음악가가 아닌 연주자만 양성하고 있는 것이다. 연주자도 넓은 의미의 음악가에 속하지만, 본질적으로 음악가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작곡과 연주가 분리된 서양고전음악계에서는 연주자를 음악가(Musican)라 하지 않고 해석자(Interpreter)라 한다고 한다. 예전의 우리 전통음악 명인들은 당연히 스스로 음악을 만들려고 했고, 만들 줄 알았다. 특히 독주곡은 작곡가보다 연주자들이 더 잘 만들 수 있다. 악기의 특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국악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연주자들이 창작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는 현실이야말로 국악의 발전이 더딘 가장 큰 요인이다. 음악 감상교육 또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세상에는 들어봐야 할 좋은 음악이 너무도 많은데, 학생들은 들어볼 기회도 없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학생시절에 음악을 다양하게 많이 들어야 음악에 대한 보편적 감수성이 생겨난다. 특히 우리 전통음악과 비교될 수 있는 타민족의 전통음악에 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다른 음악을 듣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음악의 미학과 원리를 모두 놓쳐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창작을 하려고 하면 어려서부터 듣고 배워 익숙한 서양음악 어법으로 작곡을 하려고 든다. 국악 연구의 미흡 국악교육이 이토록 문제가 많은 것에는 국악이론 연구자들에게도 큰 책임이 있다. 이론 연구가 잘 되어 있어야 학교에서 가르칠 것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국악 창작에 필요한 이론의 연구가 미흡해 보인다. 그 결과, 국악작곡과에도 국악작곡 기법에 관한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마련돼 있지 않다. 간혹 연주자들이 작곡 공부를 하려고 할 때는 국악 작곡이론이 아닌 서양 작곡이론을 배우곤 한다. 논쟁을 회피하거나 무시하는 비학문적 풍토가 만연한 것도 문제다. 자신의 이론에 후배가 학술적인 이의를 제기하면 토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적으로 배척해버린다. 건전한 비판을 받아들여 자신의 이론을 수정할 수 있는 자세를 가진 학자들을 국악이론계에서는 만나기 어렵다. 타민족 전통음악과의 비교연구도 부족하다. 다른 나라의 민족음악을 함께 연구함으로써 우리 음악에 대한 연구가 훨씬 잘될 수 있다. 외국 유학을 하고 온 학자들이 한국에서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국악 비평의 부재 국악에서 창작국악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국악 비평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국악비평은 '주례사 비평'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좋은 것만 쓰고 미흡하거나 잘못된 것은 지적하지 않는다. 다른 예술분야, 예컨대 문학이나 영화, 연극판에도 주례사비평이 더러 있지만 국악계만큼은 아니다. 비평의 본래 기능은 미흡한 것을 지적해줌으로써 더 좋은 작품을 만들게 하는데 있다. 흔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칭찬이 비판보다 효과가 좋기 때문에 칭찬을 주로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평의 대상이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있을 때나 통하는 말이다.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경우에는 주례사비평이 약이 아니라 독이 될 수도 있다. 비평가가 비평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지 않고 어울려 공존하려는 태도로는 비평다운 비평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비평이 비평답지 못한 데에는 국악인들이 유난히 비평을 수용하지 못하는 풍토가 있다. 비평에 무조건적인 거부감을 느끼는 풍토는 분명 전근대적인 것이다. 스스로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평가가 비평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그 또한 허망한 일이다. 비평이 제대로 돼야만 작품들의 수준이 올라가고, 그래서 국악이 활성화되고, 그래야 비평가의 영역도 넓어진다. 객관적인 비평이 음악가들에게 분명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국악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비평가들이 노력을 해야 한다. 인습의 폐해 국악계 뿐 아니지만, 인맥의 굴레가 국악의 발전을 상당히 저해하고 있다. 특정 학교 출신이나 특정한 스승의 제자들이 세력을 형성해서 국악계의 변화를 가로막는 역할을 한다. 위대한 인류 음악유산의 하나임에 분명한 우리의 산조를 예로 들어보자. 산조를 좋아하는 중견 연주자들에게 '왜 당신의 산조를 만들지 못합니까?"라고 물어보면, "에이~ 선생님들이 알면 무지하게 야단 쳐요. 어디서 건방지게 네 산조를 하냐고..." 이런 선생들 중에는 알고 보면 자기도 산조를 만들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진정한 명인들이라면 제자들에게도 "너 스스로의 산조를 만들어보라"고 용기를 주어야 마땅하다. 교수나 교사의 채용 과정에서도 능력이 아닌 다른 이유가 우선되는 경우가 있지 않은지, 그밖에 이런저런 인습이 예술가들의 발목을 잡고 있지 않은지, 국악인들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한다. 앞서 국악계의 상황과 국악 교육과 연구와 비평의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국악 창작에 촛점을 맞추어 그 문제점을 살펴보겠다. 국악으로서의 정체성 부족 국악계에서 발표되는 모든 음악들은 모두 '국악'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다. 작곡가든 연주가든 국악계에서 활동을 하는 이들이 만드는 음악은 국악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국악으로 발표되는 음악 중에는 국악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지 않은(또는 갖지 못한) 음악이 많다. 국악으로서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국악의 정체성은 당연히 전통 국악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전통 국악의 음계, 선법, 장단, 시김새, 말붙임새 등의 음악적 요소가 충분히 들어가 있어야 국악이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요즘 발표되는 국악계의 창작음악 중에는 이런 요소들이 거의 들어있지 않은 곡들이 많다. 이른바 퓨젼국악이라고 발표되는 곡들 중에도 퓨젼이 아니라 서양음악풍의 곡이 많다. 퓨젼국악이란 국악과 다른 음악이 섞인 것을 말할텐데, 국악이 전혀 섞이지 않았는데도 퓨젼국악이라고 한다. 알고 보면, 국악기 몇 개를 양악기와 섞어서 연주했다고 해서 퓨젼국악이라고 하는데, 이는 악기가 섞인 것을 음악이 섞인 것으로 혼동하는 것이다. 음악이 섞이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수많은 갈래의 음악들이 서로 섞여서 새로운 음악들이 생겨난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발견한다. 우리 전통음악도 아시아 대륙을 비롯한 여러 음악과 섞인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랜 시간동안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이지, 짧은 시간에 인위적으로 섞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어떤 음악이 다른 음악과 섞이더라도 그 음악 자체의 본질이 유지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서양음악이 들어온 역사적 과정은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었다. 군함과 대포를 앞세운 외세의 강요에 못이겨 억지로 받아들인 문화였고, 그래서 음악도 자연스러운 섞임의 과정이 아니라 외래음악이 전통음악을 밀어내는 형국이 되었다. 전통음악에서 파생된 산조, 판소리, 신민요 등이 음악시장의 한 자락을 차지하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외래음악에 밀려 쇠퇴하였고 해방 후에는 서양 대중음악(팝음악)의 홍수로 더욱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우리 전통음악의 역사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이상 자세히 논하기는 어렵다. 다음 기회를 기약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전통음악이 외래음악과 좀처럼 쉽게 섞이는 음악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악기나 창법 등에서 외래음악과 많이 섞였다고 주장할 지도 모르겠으나, 음악의 본질을 보기 바란다. 오늘날 한국 내에서 유통되고 있는 음악의 근원에 대해서도 별도의 연구와 토론이 필요하다. 국악인들이 국악기로 굳이 연주하기도 쉽지 않은 서양악곡을 연주하는 이유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국악기는 국악을 연주하는데 맞게 만들어져 있다. 음계도 그렇지만, 우리 음악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시김새(농현)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것이 국악기다. 국악기는 평균율 체계의 서양악곡에 맞지 않고 화음을 내기 어렵기 때문에, 국악기로 서양악곡을 연주하면 듣는 사람이 괴롭다. 서양음악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서양악기가 훨씬 낫다. 국악은 주로 5음계를 사용하고, 선법이라는 개념이 적용되는 대신 화성 개념은 없다. 반면에 근대 이후의 서양음악은 7음계를 주로 사용하고 화성이 중요한 반면, 선법의 개념은 없다. 결국 음악의 핵심요소인 음조직에 있어서 국악과 서양음악은 크게 다르다. 여기에 국악의 특징인 시김새가 서양음악에는 없어서, 국악과 서양음악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국악기를 사용했더라도 7음계와 화성을 사용하고 시김새를 구사하지 못하면, 그 곡은 국악이 아니라 서양악곡이 된다. 새로운 국악을 만들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일찌기 퓨젼을 시도한 예는 아주 많다. 쉽게 김덕수패가 했던 사물놀이와 재즈의 퓨젼의 결과는 어떠한가? 김덕수패는 풍물 장단을 연주했고, 레드선 그룹은 선율을 담당했다. 그 결과는 이색적인 리듬의 재즈일 뿐이었다. 선율이 리듬에 앞서기 때문이다. 이런 퓨젼은 재즈에 우리 리듬을 빌려준 것일 뿐, 사물놀이 자체의 발전은 아니다. 퓨젼재즈일지언정 퓨젼사물놀이는 아닌 것이다. 사물놀이가 변화를 꾀하려면 전통 장단을 응용한 새로운 장단을 만들어내는 게 옳다. 선율을 넣고 싶다면 미국의 재즈선율이 아니라 우리 전통 태평소가락을 넣으면 된다. 퓨젼을 하더라도 우리 음악에 중심을 두어야지, 남의 음악에 중심을 빼앗겨서는 안된다. 왜 국악인들이 서양음악에 경도되어 자꾸만 서양음악풍의 곡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교육의 문제점에서 지적했듯, 서양음악이 더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국악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음악을 만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익숙한 서양음악이 나와버리는 것이다. 교육이나 일상적 음악환경이 그래서 중요하다. 어려서부터 의무적으로 자기네 전통음악을 배우는 나라도 많다. 창작 의욕의 부재 국악의 정체성 혼란보다 더 큰 문제는 작곡가를 제외한 국악인들이 창작을 하려는 생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악 연주자들은 그저 배운 대로 또는 악보 그려준 대로 연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전통음악의 보존이 목적인 국립국악원이라면 모를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다. 이것도 역시 작곡가와 연주자가 구분돼 있는 서양 고전음악계의 관행을 그대로 모방한 결과인 것같다. 하지만 국악에는 원래 작곡가가 따로 없었다. 옛 명인들은 모두 자기 음악을 만들 줄 알았다. 산조는 누가 작곡해준 것이 아니라 연주에 능한 명인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다. 물론, 산조는 판소리와 시나위의 선율을 참조하여 독주곡으로 만든 것이지만, 어쨌든 스스로 창작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무슨 악기의 명인이란 소리를 들으려면 자신의 산조 하나쯤은 만들어야 한다. 산조를 싫어한다면 모를까, 자기 산조를 만들지 못한 사람은 결코 명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창작곡을 연주하고자 하는 연주자들이 대부분 작곡가에게 곡을 의뢰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작곡가들이라고 해서 모두 국악곡을 잘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작곡가들도 학교에서 전통음악의 원리와 미학에 대해 별로 배운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작곡가들은 학교에서 전통음악 작곡법보다 화성악 등 서양음악 이론과 작곡법을 더 많이 배운다. 서양작곡법은 체계회되어 있는 반면, 국악작곡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작곡가들이 연주하는 악기는 피아노나 기타가 대부분이다. 이래저래 서양음악에 익숙한 것이다. 특히, 작곡가들은 국악 독주곡을 거의 만들지 못한다. 독주곡이라 화성을 쉽게 쓸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연주자들이 스스로 독주곡을 만들어 연주해야 하는데, 그럴 생각이 있는 연주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작곡에 대한 오해 국악 창작의 방향을 이해하고 음악을 만들어보려고 해도 중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작곡이라고 해서 작곡가들이 하는 것을 흉내내려고 하다 보니 서양 화성악도 배워야 하고 그러다 점점 어려워지는 것이다. 특히 독주곡은 전혀 작곡가들을 흉내낼 필요가 없다. 악기 구사능력이 충분하다면 머리에 떠오르는 선율을 즉흥적으로 연주해 보는 것이 창작의 시작일 것이다. 실은 전통음악의 생명력은 즉흥연주에 있다. 우리 옛 명인들은 누구나 즉흥연주의 대가였을 것이다. 시나위는 원래 즉흥연주였고, 산조도 그런 배경에서 생겨나와 점차 일정한 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연주자들이 곡을 만들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악기로 즉흥연주를 시도해볼 일이다. 전통음악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도나 페르시아(이란) 등의 전통음악가들은 즉흥연주 능력이 뛰어나다. 관객들도 명인들의 즉흥연주를 공연의 백미로 여기고 숨을 죽이고 즉흥연주를 경청한다. 우리도 옛날에는 그랬다. 그 멋진 전통이 전승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추어리즘의 만연 국악계는 일정한 울타리가 형성되어 있다. 넓지 않은 울타리다. 국악인들 스스로가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고, 관객들도 울타리 안에서 논다. 그러다 보니 객관적 시각이 부족해지기 쉽다. 자기 만족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곡을 만들고 연습을 해서 공연을 할 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 한다는 느낌이 부족하다.공연이 끝난 후에는 관객들이 어떻게 느꼈는지 크게 궁금해하지 않는다. 자신은 최선을 다 했다 해도 객관적으로 보면 수준에 못미치는 경우가 있는데 말이다. 국악비평가라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잘못된 점을 짚어주기보다는 대강 잘했다고 하고 만다. 그러니 음악가들은 자신들이 만든 음악의 수준이 어떤지, 연주의 수준이 어떤지, 객관적으로 알 수가 없다. 스스로 공연을 되돌아보고 국악 동호인들이 아닌 사람들의 의견을 들으며 더 좋은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려 고민해야 할텐데, 남의 의견을 열심히 들으려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음악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프로 정신이 없으면 대강대강 해도 괜찮은 아마추어나 다름없을 것이다. 국악계 안에서는 그렇게 해도 자기가 최고인지 몰라도, 국악계 밖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국악의 여건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지만, 프로가 여건을 핑계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3회에 걸쳐 국악의 현황과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문제점을 직시한다면 해답은 저절로 나올 것이다. 국악의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국악계 전반에 혁신이 필요하다. 먼저, 국악교육 커리큘럼의 혁신이 필요하다. 악기연주 위주의 교육에서 음악에 대한 이해와 그에 기반한 음악창작 교육으로의 혁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서의 국악이론 연구 풍토의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탁상에서 하는 학문이 아닌 국악 발전에 필요한 실용적인 학문이 필요하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규명되지 않은 국악의 본질과 특성에 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그 결과물을 기반으로 새로운 국악교육 커리큘럼을 만들어 시행해야 한다. 창작 의욕과 소질을 중시하는 쪽으로 국악 입시제도를 혁신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연주전공 입시에도 일정한 모티브를 주고 즉흥연주를 하게 함으로써 음악적 소질을 테스트할 수 있다. 대학 입시제도 하나만 바꿔도 교육 커리큘럼이 혁신될 것이다. 교수 채용이나 평가제도 역시 실력을 중시하는 객관적 평가방식이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기존 음악의 보존에만 치우친 인간문화재 제도도 개선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새로운 국악곡 생산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국악관현악단은 해체하는 것이 옳다. 대신, 10여 명 안팍의 복수 악단을 구성하여 악단마다 특성있는 새 국악을 만들어 연주하면 된다. 모든 악단은 자체적으로 곡을 만들 수 있어야 하며, 특히 독주곡은 그러하다.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은 즉시 스스로 창작하기를 시작하라. 청년 국악인들에게 권함 모든 사회분야가 그렇듯, 국악의 발전은 청년들에게 달렸다. 청년들이 국악 발전의 돌파구를 열어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권고사항들을 열거한다. 1. 전통음악에 관한 미학과 이론적 지식을 갖추라. 2. 전통음악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내공을 쌓아라. 3. 전통에 기반한 새로운 음악 창작에 인생을 걸어라. 4. 음악가로서 철학적 기반과 인문교양을 쌓아라. 책읽기, 글쓰기, 토론에 익숙하라. 5. 인류의 음악유산 전반에 대해 관심을 가져랴. 특히 아시아 대륙의 전통음악에 대해. 6. 잘못된 인습과 관행의 굴레를 벗어나라. 권위를 강조하는 스승은 좋은 스승이 아니다. 7. 보편적, 객관적 시각을 갖추려고 노력하라. 비평을 고맙게 여겨라. 8. 실용적이고 유연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친구와 동료를 구별하라. 9.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라. 프로는 변명하지 않는다. 10. 1인 다역을 하라. 효율적인 생존전략이다. 마무리 지금까지 국악의 현황, 문제점, 그리고 해결방안을 제시해 보았다. 국악은 그동안 잊혀졌던 훌륭한 음악으로서 새롭게 인식되고 있으며, 국내외의 여건도 점점 좋아지고 있어, 앞으로 발전의 가능성이 아주 많다. 우리 전통음악은 세계 어느 나라 음악에도 뒤지지 않는 예술성과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 잘 보존하는 한편, 이를 기반으로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대인들에게 통할 수 있는 새로운 국악을 만들어내는 것이야 말로 국악인들이 인생을 걸고 할 만한 일이다. 이를 위해 국악인들 스스로 국악의 현황과 문제점을 직시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스스로 과감한 혁신과 노력을 해야 한다. 국악의 밝은 미래는 혁신과 노력을 해내는 사람에게 활짝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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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0-02
  • 마산에 한국 최고의 가곡전수관을 건립한 조순자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가곡은 조선조에 크게 발달한 성악이다. 그냥 ‘노래’라는 용어가 사실은 가곡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만큼 가곡은 일반에게 친숙한 것이었고 교양인들이 즐겨 부르던 것이었다. 19세기말 20세기 초만 하드라도 기생이 되려면 가곡부터 배워야할 정도로 가곡의 수요는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곡을 들어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19세기말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서양음악과 대중음악의 영향으로 한국인들의 음악 감성은 완전히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국악을 전공하는 사람 가운데도 가곡 전공은 극히 드물 정도로 가곡은 이 시대에 외면당하는 음악이 되었다. 그 명칭마저 서양음악언어로 작곡된 가곡에 빼앗겨 버려 한국가곡하면 으레 ‘그리운 금강산’이나 ‘가고파’를 떠올리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서울도 아닌 마산에 최고의 교육시설과 연습여건을 갖춘 가곡 전용극장을 개관하여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의 예능보유자 조순자명가(名歌)이다. 500평쯤 되는 대지에 가곡전수관과 공연장을 지었는데 교육시설과 연습실은 2006년에 개관했고 금년에 150석 규모의 공연장을 개관하여 기념공연과 학술대회를 9월29일부터 10월2일까지 나흘간 성대하게 했다. 개관기념공연 첫날은 서울에서 이동규(남창)·사재성(장구)·송인길(가야금)·윤문숙(해금)·곽태천(피리)·윤선숙(거문고)·이삼스님(대금)·최종민(해설)이 내려가 평조회상·별곡·청성자진한잎과 가곡의 언락·우락·편락·편삭대엽·대받침(태평가) 등을 연주했는데 그야말로 명품음악회였다. 참석한 사람들도 품격 높은 정악을 감상하며 마산의 명소로 자리잡아가는 가곡전수관의 개관을 축하해 주었다. 30일에는 전국에서 활동하는 시조 가객들이 함께하여 전국시조열전을 벌였고 10월1일에는 조순자 문하생을 중심으로 하는 국악연주단 정음의 가곡 공연이 있었다. 그리고 2일 마지막 날은 13시에 가곡과 가객을 주제로 개관기념학술대회를 했고 저녁에는 서울대 정대석교수가 이끄는 거문고 그룹 동보악회의 ‘거문고 바람을 타다’라는 타이틀의 공연이 있었다. 그 외에도 1999년 마산MBC 창사 30주년 특집다큐로 만든 ‘천년의 노래’ 100분짜리를 9월30일 13시에 상영했고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제작한 55분짜리 다큐멘터리도 상영했다. 개관기념행사만 보드라도 조순자라는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성취했고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순자는 194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명성여고를 졸업할 무렵 국악과 만날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당시 KBS국악연구생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여자들을 모집하여 국악과 무용을 가르쳐 방송에 활용하고자 만든 제도였다. 국비로 가르치기 때문에 많은 지원자가 있어서 1기는 60명을 뽑았었고 2기는 30명을 뽑았는데 조순자는 2기로 들어가게 되었다. 출근하면 공부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여서 오전에 김천흥에게 춤을 배우고 나면 오후에 성금련에게 가야금병창을 배우고 또 이창배에게 경·서도소리를 배우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판소리는 국립국악원의 강장원에게 배웠고 가야금은 김병호에게도 배웠다. 설장구는 이정범에게 소고와 괭가리는 전사섭에게 배웠다. 모두 기라성 같은 국악계의 명인·명창들인데 그들에게 알짜 국악을 공부한 것이다. 그러면서 방송을 하고 원각사 등의 공연장에서 공연활동도 했다. 내가 조순자를 기억하는 것은 1964년 한국의 아악이 최초 해외공연을 일본으로 갔는데 그 때 조순자가 20세의 나이로 이주환과 함께 태평가를 불렀다는 보도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후 조순자는 국립국악원에 있으면서 ‘67년에는 대만공연을 다녀오고 ’68년부터는 인천에 있는 인화여고국악반교사로 자리를 옮겨 활동했는데 1970년 결혼하면서 마산으로 내려갔다. 조순자는 가곡과 가사만 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처녀시절 국악의 명인들에게 가야금, 거문고, 경·서도소리, 판소리, 가야금, 설장구, 소고, 괭가리까지 철저히 배우고 활동했기 때문에 국악에 만능이라 해도 될 정도인데 마산에 자리를 잡게 되니 그 모든 경험이 다 쓸모 있는 활동이 전개되는 것이었다. ‘ 73년 마산MBC에서 초대손님으로 박종원교수(마산교대)와 방송한 것이 인연이 되어 마산교대강사 경남대학교 음악과 강사 등을 하면서 대학에서 국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75년에는 국악교육연구회를 만들어 교사들의 국악강습을 도맡아 하고 교육용단소와 교재를 만들어 보급하는 등 국악교육에 많은 업적을 쌓기도 했다. 그리고 본인이 진행하는 국악방송 ‘우리가락 시나브로’를 만들어 지금까지 마산MBC에서 매주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방송하고 있다. 한 여성으로서 국악의 종합적인 지도자로서 많은 활동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열심히 국악을 위해 노력한 덕분인지 2002년 조순자는 당시 공석으로 있던 여창가곡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게 된다. 국악인에게 예능보유자가 된다는 것은 가장 명예로운 것이다. 그러나 책임 또한 큰 것이다. 그런데 조순자는 가곡의 예능보유자가 되면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더 분명하게 내다 볼 수 있었고 그 일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해 나가게 되었다. 국악전반에 걸쳐 배우고 익히고 활동했던 경험들이 이제는 정가와 정악을 지키고 확산시키는 운동으로 힘을 모으게 된 것이다. 우선 정가를 품격 있는 노래로 보급하자면 공간이나 분위기나 드나드는 사람들의 태도가 그에 걸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공간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는데 다행히 그 동안의 경험과 삶의 축적이 그런 조선생의 구상을 실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전수관을 짓기 위한 국비·도비·시비 등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 금 개관을 마무리 한 가곡전수관은 그렇게 하여 만들어졌다. 어느 예능보유자도 하지 못한 일을 조순자가 해 낸 것이다. 보유자 조순자는 벌써 5명의 이수자를 내었고 60여명의 전수생과 문하생이 공부하고 있다. 마산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매주 월요일 서울에 올라와 가르친다. 서울에서 배우고자 사람들을 위해 국립국악원101호 교실에서 오후2시~8시까지 가곡을 무료로 가르친다. 가곡보급을 위한 대단한 정열이다.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을 이룬 조순자 같지만 그의 마음속은 가곡의 가치를 모르고 가곡의 존재조차 모르는 한국 사람들이 한 없이 불쌍한 모양이다. 그들을 일깨우기 위해 가곡전수관의 시설과 인력을 풀 가동하여 가곡과 정악이 전국으로 아니 세계로 뻗어가도록 운동을 벌일 사람이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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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28
  • 재주와 끼가 넘치는 윤진철 명창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최종민 교수는 1942년 강릉 태생으로 서울대 음악대학 국악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성균관 대학 동양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68년 안동교육대학 교수로 출발 강릉대, 전남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를 거쳐 남원정보국악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후 국립창극단장을 지냈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민속음악>, <국악의 새로운 숨결>,<민요-이렇게 가르치면 제맛이 나요>, <한국전통음악의 미학사상> 등이 있다. 광주 MBC에는 ‘얼씨구 악당’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93년에 만들어져 지금까지 방영 중인데 이 프로그램을 만들어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게 한 진행자가 윤진철 명창이다. 그의 재치 있는 말솜씨와 막힘없는 소리실력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30대 초반에 전주대사습놀이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고제 판소리를 많이 연구하고 재현하는 윤명창인지라 소리라면 어떤 소리도 흉내 낼 수 있을 만큼 폭넓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광주시립국극단이 ‘창극 쑥대머리’를 할 때는 주인공 임방울 역을 하기도 하고 가끔 서울에 올라가 국립극장의 완창판소리 무대에 서기도 한다. 그 동안 상도 많이 받았다. ‘98년에 제25회 한국방송대상 국악인상을 받았고 ’05년에는 KBS 국악대상을 받기도 했다. 또 ‘06년에는 판소리 적벽가로 대한명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많은 활동을 하며 판소리 저변확대에 누구보다 많은 업적을 쌓아가는 윤진철명창이다. 윤진철은 1964년 목포에서 평범한 가정의 3남1년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했던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시립국악원에 나가 김흥남사범에게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6,7년 그렇게 배우면서 공부욕심이 생겨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의 김소희명창을 찾아갔다. 처음 찾아가는 윤진철은 본인이 그린 그림 한 점과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 한 점을 선생님 앞에 내 놓으며 “저는 돈이 없어 학채를 낼 수 없으니 이것을 받고 좀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 때부터 김소희선생은 윤진철을 제자로 받아드렸고 선생님 집에서 먹고 자면서 공부하게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공부한 진철은 자연스럽게 김소희선생이 출강하던 한양대학교 국악과로 진학했다. 그러나 계속 서울에서 대학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 그는 목포로 내려와 어린 제자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 때 가르친 제자 중 하나가 친구의 동생인 오정해였다. 중학교 1학년인 오정해는 윤진철이 판소리를 배웠던 김흥남에게 배우고 있었는데 서울물을 먹으며 공부한 윤진철이 봤을 때 어딘지 촌티가 나는 소리를 했다. 그런 오정해를 가르치고 다듬어서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대회에 내 보냈는데 중학교 2학년인 오정해가 고등학생까지 있는 학생부에서 장원을 했다. 대단한 성과였다. 그런 오정해를 보고 김소희선생님이 “저 애 나 도라(달라)”해서 오정해를 김소희 문하로 보냈다. 오정해에 이어 조주선도 가르쳤다. 지금 국립국악원에 있는 조주선도 윤진철이 아르바이트 식으로 목포에서 가르쳤던 제자 중의 하나다. 윤진철은 계속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전남대학교에서 가르치던 정권진명창을 찾아갔다. 중2 때 찾아갔을 때엔 “소리하지 말고 돈 버는 길로 가라”고 하셨던 분이었는데 정권진의 음반을 듣고 다 외워가지고 찾아간 윤진철의 소리를 들어보고는 “너 소리하면 되겠다. 소리해라”해서 정권진의 제자가 되었다. ‘85년 다시 전남대학교 국악과에 들어가서 한 참 공부에 재미를 붙일 만 했는데 ’86년 정선생님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래도 3년 동안 정권진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정선생은 “옳게만 가르쳐라”하시면서 소리 가르치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동창, 여창, 남창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따로 가르쳐 주었다. 동창은 어린이에게 가르치는 방법이고 여창은 여자에게 가르치는 방법이다. 어린이가 하는 판소리와 여자가 하는 판소리는 목이 남자의 목과 다르기 때문에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이 달라야 한다. 그런 것까지 가르쳐준 정권진 선생님 덕분에 지금 윤진철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윤진철은 가르치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 같다. 20세 전후에 오정해 조주선 같은 제자를 가르쳤고 지금도 40여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 광주에 살면서 토요일과 일요일은 서울 올라가서도 가르친다. 대학을 졸업한 후 잠시 전남도립국악단에 근무한 적이 있지만 그는 끊임없이 제자를 양성하고 국악운동을 펼치며 살았다. 광주지역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귀명창을 키우는 울림 창악연구회’를 만들어 주2회 실기와 이론을 4개월 단위로 가르쳤는데 7,8년 동안에 3천명 가령의 회원이 확보됐다. 그런 국악운동은 광주에 귀명창이 많이 늘어나는 변화를 가져왔고 MBC에 ‘얼씨구 악당’이 만들어지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 윤진철명창 판소리 심청가 황성가는 대목 중 방아타령 동영상 보기윤진철은 그 때부터 스튜디오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국악을 재미있고 쉽게 알도록 진행했다. 아예 내용 자체를 해학적인 주제로 잡아 전체를 웃으며 보고 즐기게 만들었다. 그 프로그램 덕에 광주에는 국악의 저변인구가 늘어나게 됐고 윤진철은 누구나 알아보는 유명인사가 됐다. 그렇다고 해서 윤진철이 스스로의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니다. 판소리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독공(獨功)의 기간을 꾸준히 가져야 대성할 수 있는 것이다. 윤진철은 해마다 겨울철이면 화순 동복에 있는 정수사에 들어가 석달정도 독공을 한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산공부도 하지만 반드시 집중적으로 연습하는 독공의 기간을 가진다. 독공을 할 때면 정권진선생의 음반을 자주 들어보는데 선생의 소리를 들으면 목을 어떻게 쓰는지, 힘은 어떻게 주는지, 호흡은 어떻게 하는지, 성음이 어디서 나와 어디를 울리며 나오는지 등을 느끼게 되고 많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것을 어느 정도 터득하고 나서 소리하니까 듣는 사람들이 “네 소리가 달라졌다”는 말을 많이 해 주었다. 또 고음반을 들으며 연구하는데 옛날 명창들의 소리를 들어보면 목 쓰는 방법이나 소리하는 속도, 표현하는 방법 등이 요즘 소리와 다르다. 방울목을 쓴다든지 덜미소리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들어볼 수 없지만 고음반의 그런 소리를 들어보면 참 좋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윤진철이 하는 일은 참으로 다양하다. 판소리명창으로 무대에서 소리를 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사범으로 활동하고, 제자들이 공연하거나 경연대회에 나가면 북 치는 고수역할을 하기도 하고, 전남대학이나 남도대학에 나가 가르치기도 한다. 그런데 한 가지 특별한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고 지금도 꾸준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만난 날도 그림 스케치하러 간다면서 행장을 꾸려 떠나는 것을 봤다. 그가 그린 그림을 모아 연말에 전시회를 할 예정이라는 말도 했다. 하여간 재주 있고 부지런한 윤진철이어서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잘 될 것이지만 더욱 많은 성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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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28
  • 한국의 종교음악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언젠가 어느 학생이 나에게 질문을 하였다. “종교와 미신은 어떻게 다릅니까?”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무척 진지하게 공부하는 학생의 질문이라 나는 종교와 미신이 어떻게 다를까 하는 문제를 한참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학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내가 믿으면 종교이고 남이 믿으면 미신이래요”하는 것이었다. 나와 그 학생은 깔깔 웃으면서 농담 비슷하게 지나쳐 버린 적이 있다. 내가 믿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니까 종교가 되지만 남이 믿는 것은 배타적으로 생각하니까 미신이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농담으로 하는 얘기여야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올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 종교의 범주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다 들어가는 것이지 어느 특정 종교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몇 몇 대학의 종교음악과를 보면 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학과의 명칭은 종교음악과인데 가르치는 내용은 기독교음악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종교음악은 곧 기독교음악이다”라는 생각이 팽배해져서는 곤란하다는 말이다. 우리 나라에는 많은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무당들이 주재하는 무속종교(巫俗宗敎) 즉 무교(巫敎)가 있고 불교가 있고 유교가 있고 천주교나 개신교가 있다. 이 중에서 무교는 우리 고유의 종교이지만 나머지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들어온 외래 종교이다. 삼국시대에 들어 온 불교․도교․유교등은 기존의 우리종교와 적당히 습합하면서 한국화되어 우리의 외래종교로 자리를 잡아 오랜 세월동안 우리 나라의 종교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도교는 의식이 끊어져서 이제는 종교로서의 기능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지만 나머지 불교나 유교와 무속종교는 큰 마찰 없이 잘 공존 해 온 셈이다. 그러다가 조선조에 천주교가 들어오고 조선조말에 개신교가 들어오고 현대에 와서 회교등이 들어오고 하여 지금은 동서고금의 종교가 공존하는 한국의 종교현황이 되었다. 이처럼 많은 종교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은 우리네의 종교심성이 그 만큼 많은 것을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나라에서는 종교가 다르면 전쟁도 불사한다는데 우리는 한 집안에 살면서 할머니는 무당에게 묻고 어머니는 절에 다니고 아버지는 향교에 나가고 누나는 성당에 동생은 교회에 다녀도 아무런 마찰 없이 지내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한 집안의 귀한 아들이 대학진학을 앞두었을 때에는 그런식으로 식구마다 자기가 다니는 종교에 가서 그 수험생이 소원하는 대학에 진학하도록 비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종교는 무슨 종교이든지 의식에서는 음악을 사용하게 되어있다. 우리 나라사람들이 종교심성이 풍부하여 많은 종교를 잘 발전시켰다는 것은 곧 많은 종교음악을 잘 발달시켰다는 얘기도 된다. 더구나 우리는 음악을 잘 하는 민족이기 때문데 많은 종류의 훌륭한 한국적 종교음악을 수준 높게 발달시켰다. 무속종교라고 하는 굿을 할 때 하는 음악만해도 각 지방에 많은 양이 전승되며 수준 높게 발달되어 있다. 엄청난 양의 무가(巫歌)도 훌륭한 음악이지만 무가나 무무(巫舞)에 반주하는 기악도 대단히 중요한 합주음악이다. 서울지역의 염불․타령․굿거리․당악같은 기악은 지금도 각종 민속무용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되는 음악이고 경기 도당굿에서 사용하던 시나위 음악도 도살풀이나 태평무의 반주음악으로 쓰이는 귀중한 기악이다. 전라도 굿의 무가나 반주음악도 훌륭한 민속음악의 장르가 되어 있다. 그런데 굿 음악의 대부분은 순 한국음악어법으로 되어 있어서 더욱 소중한 우리의 음악유산이다. 불교의 음악 역시 엄청난 양의 범패(梵唄)와 기악등이 전승되고 있다. 불교음악이 한국에 들어 온 것은 신라 때인데 그 당시에 이미 고풍(古風)․당풍(唐風)․향풍(鄕風)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인도음악 스타일로 된 고풍과 중국음악 스타일로 된 당풍과 한국음악 스타일로 된 향풍이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범패를 분석한 한만영씨도 한국의 범패에는 인도음악 스타일이 많이 남아 있는 짓소리와 가사가 중국의 정형시로 된 홋소리와 가사와 곡조가 한국 스타일로 된 화청등이 있다고 한 적이 있다. 현재의 불교음악은 중국으로부터 들어 온 후 계속 한국화를 거듭해온 짓소리나 홋소리 외에 순 한국식으로 발달한 화청도 있다는 것이다. 유교 음악 역시 중국으로부터 받아 들였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조선조 세종 때에는 유교음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문묘제례악과 종묘제례악을 모두 한국에서 작곡했는데 문묘제례악은 중국음악어법으로 작곡하고 종묘제례악은 한국음악어법으로 작곡하였다. 유교음악도 한국식 유교음악이 있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한국에 와서 한국의 심성에 맞게 변형되면서 한국의 종교로 발전한다고 보아야 한다. 종교음악도 마찬가지로 외래종교와 함께 외국음악이 한국에 들어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한국화 하기도 하고 종래에는 한국음악어법의 한국식 종교음악을 발달시키게 된다. 불교음악이 그랬고 유교음악이 그랬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기독교 음악은 어떤가?. 우리 나라에 선교사로 왔던 미국사람들은 바이블과 함께 그들의 종교음악도 가지고 와서 선교를 하였다. 예수만 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음악문화도 함께 전파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의 선교사들이 외국에 나가 선교할 때에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우리의 기독교 음악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음악문화를 전파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선교사의 심부름꾼과 같은 역할 밖에 못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우리 나라 각 교회 지도부의 그릇된 종교음악관 때문이다. 저들은 선교사들이 선교할 때 사용한 그 음악이 기독교 음악의 표준인줄 알고 있다. 그래서 노래 곡조와 가사가 전혀 안 맞는 그 불편한 찬송가를 부르면서도 우리 가사에 맞는 한국식 찬송가를 만들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이런 편견과 잘못된 생각 때문에 한국의 기독음악은 외국음악에 머물고 한국식 기독교 음악이 발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음악이라는 용어도 왜곡되게 사용하고 있고 외국 선교에서도 우리음악을 전파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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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28
  • 어머니의 조기교육이 인천국악의 사령탑 되게한 이순희명창
    故 최종민교수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문화예술대학원 교수) 어머니들 중에는 자기가 하고 싶었던 예능을 어린 자녀에게 가르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하고 춤을 가르치기도 한다. 그렇다고 그 자녀들이 다 그 방면의 예술가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아주 드물게 그런 조기교육이 성과를 거두어 예술가의 길을 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가 오늘 소개하려는 이순희명창도 따지고 보면 어머니의 조기교육이 큰 결실을 맺은 경우이다. 이순희의 어머니는 박일심(1923~2003)이라는 예명으로 널리 알려진 양영숙이다. 어린 시절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양영숙은 소리가 배우고 싶어 어머니에게 5원 30전을 빌려 조선권번을 찾아갔다고 한다. 조선권번의 소리선생 최정식이 “너 이름이 뭐냐?”하고 물었을 때 다급한 마음에 당시 유명한 소리꾼이었던 고일심이 생각나 “박일심입니다.”하고 대답한 것이 그냥 이름으로 굳어져 박일심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박일심은 조선권번에서 3년 동안 시조, 경기잡가, 서도잡가, 잡잡가 등을 배웠는데 배정자, 조금선, 심연홍, 이세화, 김옥경 등과 함께 공부했다고 한다. 19세에 결혼하게 되어 잠시 소리를 못하고 있다가 다시 최정식의 소개로 이창배를 찾아가 이진홍은 ‘대감놀이’로 유명해졌고 이비봉은 잡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으니 자신도 무언가 특징 있는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상의하니까 이창배선생이 직접 정리한 ‘장타령’사설을 주면서 ‘장타령’을 복원해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때부터 박일심은 장타령을 연구하고 연습하며 장타령에 매달리게 되었다. 박일심이 부르는 장타령의 가짓수는 10여 종에 이르고 본인이 직접 짜서 만든 장타령도 대여섯 수는 된다. 그 중에는 그녀가 인천에서 활동하던 성음 좋은 거지에게 배운 장타령도 있다. 그렇게 박일심은 장타령으로 서울에서 이름을 날렸지만 1960년대 인천으로 이사해 살면서 서울활동은 뜸해지고 인천에서 주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녀의 장타령을 듣기 위해 이은관이나 백운선이 공연할 때 박일심을 초청하여 무대에 세우는 일도 있었다. 박일심은 전태용과 함께 공연활동을 한 적도 있고 창부타령을 녹음하여 함께 음반을 내기도 했다. 특히 창부타령을 잘 불러서 장타령을 할 때에도 중간 중간에 창부타령을 멋들어지게 부르곤 했다고 한다. 그런 박일심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이순희(1956년생)는 우리나이 다섯 살 되던 1960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조백운선생에게 소리를 배우러 갔다. 조백운선생이 돌아가시자 인천에서 학원을 하던 최창남에게 가서 배우고(1967년) 최창남이 서울로 올라가자 이영열에게 배우기 시작했는데(1971년)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이영열의 제1회 제자가 되었다. 이영열은 인천에 국악협회를 만들고 여러 가지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순희 역시 고등학생이면서도 각종 공연무대에 섰고 인성여자고등학교를 졸업(1975년)한 다음에는 사)한국국악협회 인천지부의 이사가 되어(1976년) 인천국악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러던 이순희도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결혼 후 한 동안 국악활동을 하지 못하는 시기가 온다. 맏이로 태어난 그녀가 7남매의 맏아들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부모님과 친정어머님이 계속 병환이어서 양쪽 부모님들을 돌보느라 활동을 할 수 없었다. 한 동안 집안일에 매달려 애 낳고 부모님 공경하고 그렇게 꽤 여러 해를 보내고 나서 다시 국악계로 나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오래간 만에 이영열학원에 찾아가니 거기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처음 온 사람인 줄 알고 맨 뒷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그것을 본 이영열이“저 분은 너희들 선생님 뻘 되는 대선배이시다.”하니까 그 다음부터는 잘 대해 주었다. 이영열은 이창배 정득만 등이 가르치던 청구고전성악학원 출신으로 일찍이 인천에 학원을 내고 경기소리를 가르쳤기 때문에 인천 출신의 국악인들 다수가 그의 제자라 할 수 있다. 또 17년간 인천국악협회의 지회장을 했고 수봉공원에 국악회관이 지어지게 할 정도로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인천국악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사람이다. 다시 국악계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한 이순희는 그런 이영열을 도와 민요분과위원장으로 또 부지회장으로 활동했다. 2005년 이영열이 지병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천국악협회의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보궐선거를 통해 이순희가 인천국악협회 지회장으로 선출된다. 다행히 이순희는 일찍부터 국악을 해서 국악계에서 서열이 높고 선배대접을 받으니까 인천국악협회가 어려울 때 지회장으로 뽑힌 것이다. 그래서 2005년 이래 인천국악협회는 이순희 체제로 운영되고 이순희를 중심으로 많은 사업을 추진해 가고 있다. 내가 본 이순희는 마음이 너른 사람 배포가 큰 사람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고 무슨 일이든지 마음먹은 일은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사람이다. 겉보기로는 체구가 작아 훨씬 어려보이고 예쁘게 생겨서 약해 보이지만 말하는 품이나 일하는 것을 보면 훨씬 큰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인천국악계를 잘 장악하고 산적한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며 새로운 일들을 잘 추진하고 있다. 이순희는 인천국악협회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 본인의 예술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거의 매일 개인 연습을 하고 부녀자들을 위한 민요교실을 운영한다. 또 어린이나 중·고등학생들 개인지도도 여러 명 하고 있다. 인천에서 이순희에게 배운 다음 서울의 국악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이나 대학의 국악과에 진학한 학생이 여러 명 있다. 저들은 서울의 학교에 다니지만 개인지도는 계속 이순희에게 받으면서 각종행사에도 출연하여 스승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그 동안 이순희는 2000년에 제7회 전국 경·서도민요경창대회에서 명창부 대상을 수상했고 개인발표회도 2006년과 2008년 두 차례 아주 성대하게 했다. 발표회의 프로그램에는 언제나 어머니 박일심에 대한 얘기를 싣고 발표회의 제목도 ‘장타령과 경기민요 발표회’로 할 정도로 이순희는 어머니의 소리맥을 이어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장타령은 어머니 살아생전에 직접 배웠지만 다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이 늘 있어서 계속 연구하고 녹음을 들으며 공부하고 있다. 그리고 경기민요는 어려서부터 긴잡가, 휘모리잡가, 산타령, 민요 등 다 배우긴 했지만 중간에 집안 일에 열중하느라 쉰 적이 있기 때문에 잊어버린 대목들이 많아 1987년 김금숙을 찾아가 다시 닦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도 김금숙을 스승으로 모시고 활동하며 각종 무대에 함께 서기도 한다. 지난 두 번의 발표회 때도 김금숙은 제자인 이순희와 함께 경기민요를 불렀었다. 어찌 보면 이순희는 여러 선생님에게 배웠지만 그 선생님들을 다 잘 모시려 애쓰고 있다. 이영열에게 한 것이나 김금숙에게 하는 것이나 다 그런 태도를 엿 볼 수 있다. 이순희는 어머니에게는 효녀요 시부모에게는 효부다. 또 스승님들을 잘 모시는 훌륭한 제자이다. 그렇게 은혜 입은 사람들에게 잘 하면서 제자들을 사랑하고 엄격하게 가르치면서 공적인 일을 분별 있게 처리하니까 그의 영(令)이 서고 위신이 서는 것이다. 그녀가 이끄는 인천국악협회는 15억원의 예산이 들어가는 국악강사풀제를 시행하는데 좋은 성과를 내어야하고, 국악상설무대나 찾아가는 문화활동도 잘 해야 하고 국악대제전도 잘 치러야 한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순희는 유능한 후배들과 함께 매일 출근하여 일을 처리하고 있다. 또 부족한 부분은 국악계의 권위자들에게 자문을 받아 해결해 나가고 있다. 이순희가 바라는 것은 본인이 예술가로 성공하는 것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 못지않게 인천국악협회의 구성원들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어 인천국악이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부디 그런 그녀의 꿈이 실현되어 이순희는 훌륭한 명창이 되고 인천국악협회 회원들은 훨씬 업그레이드되고 인천국악협회의 사업들은 크게 성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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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27
  • [PDF] 한국 전통음악과 월드뮤직 - 최상일 (문화방송 민요전문PD)
    ↑ 다운로드 받으세요 최상일(문화방송 민요전문PD) 2009년 9월 8일 한국은 전통음악이 매우 풍부한 나라이다. 궁중음악만 해도 한자문화권에서는 가장 온전한 형태로 전승되고 있으며, 산조, 판소리, 풍물굿 등 우리만의 독특한 민속악이 풍부하고, 민 요 또한 매우 많다. 또, 우리 민족은 음악적 감수성이 매우 풍부한 민족이다. 따라서 방향만 제대로 잡는다면 우리의 전통음악 유산을 활용하여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는 한국 고유의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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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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